안성재 셰프의 유튜브 채널에 배우 이제훈이 출연했다. 시네필로도 알려진 이제훈은 안성재에게 소주 안주를 전수 받으며 답례로 영화 <프렌치 수프>를 추천했다. 트란 안 홍에게 깐느 감독상을 안기고, 국내에서는 공복 상영회를 가졌던 것으로도 잠시 화제가 됐던 <프렌치 수프>는 만찬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낸 30분 간의 오프닝으로도 유명하다. 안성재는 이제훈에게 ‘그 영화는 제가 본 음식, 요리 영화 중에 ‘가장 멋진 영화(Best Movie Ever)’라는 극찬과 함께 예술 작품 같았다’라는 감상을 남겼다.
<프렌치 수프>의 배경은 19세기 프랑스. 당대 최고의 미식가이자 요리 연구가인 도댕(브누와 마지엘). 그리고 그의 주방을 맡은 외제니(줄리엣 비노쉬)는 역시 미식가인 도댕의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한다. 친구들은 외제니의 음식에 크게 만족하고 쉬고 있는 그녀에게 찾아와 함께 식사하지 못해 아쉽다며, 다음에는 자리를 같이하자고 제안한다. 외제니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제대로 대접하려면 여기 있어야 해요. 제 부엌에요. 저는 여러분이 드시는 음식을 통해 대화해요. 그거면 충분하답니다. 드신 음식들은 저도 다 먹었어요. 냄새 맡고, 뒤집고, 어루만지고…. 그 모든 순간이 이 부엌에서 벌어지죠. 속속들이 다 알아요. 그 색깔, 그 식감, 그 맛을요. 제대로 먹어 보지 않아도요. 그 가자미가 여러분보다 제게 더 많은 걸 줬답니다.”
외제니의 답을 들은 도댕의 친구들은 입을 모아 대답한다. 당신은 예술가예요. 고맙습니다. 안성재가 보증한 ‘가장 멋진 (요리)영화’에서, 식탁의 풍성함을 넘어 예술가가 되는 요리사는 과연 어떻게 탄생할까. 2025년 백상예술대상 방송 부문 대상을 받으며 요리 열풍을 몰고 왔던 <흑백요리사 시즌1>에 이어 엄청난 기대와 우려 속에 출발했지만, 연말연시를 장악한 화제성을 넘어 역대 최고의 요리 예능, 서바이벌이란 극찬을 받는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요리사의 시스템이 구현된 게 주방이라면,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시스템은 경연룰일 것이다. 성공적인 런칭에도 불구하고 <시즌1>에서 다소 어수선하다고 느껴졌던 주방이 <시즌2>에서는 매끄럽게 리모델링됐다. <시즌1>은 ‘요리 계급 전쟁’이라는 부제에서 요리보다는 전쟁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이는 지점이 있었고 여지없이 논란을 일으켰다. 공감하기 어려운 기준으로 팀원이 방출됐고, 최고의 재료로 최정상의 미식 대결을 기대하던 희망이 스폰서십이란 경제 논리 탓에 다소 퇴색되기도 했다. 요리의 완성도보다 규칙의 허점을 파고든 개운치 않은 승리도 있었다.
<시즌2>는 확실히 요리를 위한 주방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팀전은 대중 음식점에서 대량 조리가 장기인 셰프들이 활약할 기회, 전문가로 구성된 소수의 심사 위원의 입맛을 사로잡는 미식의 영역으로 구분됐다. 단시간에 결과를 내야 하는 서바이벌이라는 특성상 완벽한 분업까지는 어려웠으나, 팀 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수행하며 누구 하나 방치되지 않고 미션에 참여해 활약할 기회가 마련됐다.
패자부활전은 떨어지면 끝이라는 긴장감과 함께 본인이 고른 10가지의 재료라는 제약으로 스토리텔링을 함께 잡았다. 규칙은 두 명의 생존자만을 허락했지만, 외부 요소의 개입 없이 오로지 본인의 최선을 다한 이들 모두에게 시청자는 마음으로 생존 버튼을 힘껏 눌렀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대일 사생전은 같은 재료로 짧은 시간에 다른 메뉴를 내는 순발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흑백요리사>의 아이콘이 된 무한요리지옥의 완벽한 안티테제로 균형을 맞춘 무한요리천국은 요리 서바이벌에서 더 이상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을까, 다음 시즌이 걱정될 만큼의 짜임새 있는 설계를 완성했다.
제작진들은 요리사라는 재료들 역시 최상급의 원물 매입에 성공했다. 라운드마다 손을 달달 떨면서도 황태해장국과 떡볶이, 튀김이라는 대중적 메뉴로 백종원과 안성재에게 극찬을 받아낸 윤주모. 미슐랭 3 스타급의 식당 여러 곳에서 쌓은 경험으로 다진 자신감과 투지를 바탕으로 파인다이닝의 창조성과 다양성, 극한의 섬세함을 겸비하며 못 하는 요리가 있을까 이름값 하던 요리괴물. 탑7에 오른 흑수저 두 사람은 1화에서 출연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더 이상 흑백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라는 동료들의 평가를 증명했다.
임성근 셰프는 파인다이닝의 대척점에서 빨리다이닝의 시대를 열었고 일명 ‘냉부 삼형제’로 불린 손종원-정호영-샘킴은 그저 느낌만 좋은 셰프, 춤욕심 많은 셰프, 요리사도 아닌 김풍에게 당하는 셰프가 아님을 백수저다운 내공과 실력으로 입증했다. 선재 스님은 육류와 해산물을 다룰 수 없어 제약이 컸지만, 재료의 맛을 살리는 사찰음식의 진수를 선보이며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메뉴로도 심사 위원들이 코 박고 식사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경력 60년을 바라보지만, 요리에 대한 탐구와 열정을 보여준 후덕죽 셰프의 모습은 조금의 성취로도 안주하기 쉬운 나태에 부드러운 경종을 울렸다.
마지막은 직업인으로의 요리사다. 아무래도 <시즌1>은 ‘비빔 인간’ 에드워드 리의 서사가 중심이었다.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한 한국인으로 만들어왔던,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 갈 요리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 우승자인 맛피아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우승 소감으로 앞으로 자유롭게 요리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요리를 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요리사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이 <시즌1>의 테마다.
<시즌2> 엔딩에서 제작진이 자막까지 넣어가며 던진 질문은 “요리사란 누구인가?”이다. ‘누구’라는 인칭대명사로 이제 무엇이냐는 정체성에 개인의 서사가 첨가된다. 참가자들의 대답은 제각각이다. 먹고 살기 위해, 행복을 위해, 단지 즐거워서 요리를 시작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 대답을 대표하는 한 명의 요리사가 정상에 섰다. 조림인간, 조림핑, 연쇄조림마 백수저 최강록.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소개말의 마무리는 ‘나야 재도전’.
<시즌1>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1년간 인터넷을 끊으면 된다는 각오를 보였던 최강록. 재도전 뒤 진출한 3라운드 팀전에서 기존의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게 ‘지금 소리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 지금 소리쳐라. 할 수 있을 때…’라며 대결에 나선 팀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낸다. 180분 동안 팬트리에 있는 재료를 무한정 활용할 수 있는 5라운드에서는 결국 자신을 ‘욕망의 조림인간’이라 표현하며 홍어 애, 생선, 트러플, 양송이, 표고, 다시마까지 전부 조려버리며 결승전에 진출한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받아 든 대결 주제는 ‘나를 위한 요리’였다. 요리괴물 이하성 셰프는 (상대적으로) ‘요리’에 방점을 찍은 듯 보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목욕탕에 다녀온 뒤 의식처럼 먹었던 추억의 순댓국. 오랜 해외 생활을 하다가 가끔 귀국하면 가장 먼저 찾던 위로의 소울푸드. 돼지의 피와 살과 내장을 두루 사용하며 파인다이닝식으로 재해석한 순댓국은 유년기의 추억과 청년기의 좌절과 고독이 담긴 완성도 높은 한상이었다.
반면 최강록은 ‘나를 위한’에 초점을 맞췄다. 모두가 조림 음식을 내놓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본인이 좋아하는 우동육수에 구운 닭 뼈, 파를 듬뿍 넣고 가쓰오부시 육수를 섞은 국물에 여러 재료를 살짝 데쳐 넣었다. 그리고 30분간 저어서 만드는 깨두부로 마무리. 왜 자신에게 이 요리를 주고 싶었냐는 안성재의 물음에 ‘조림을 잘 못하지만 조림을 잘하는 척하며 살았는데 나를 위한 요리에서까지 조림을 하고 싶지 않았다’라는 고백. 누구도 예상 못 한 우승자의 요리가 그렇게 결정됐다. 노동주 혹은 취침주로 빨뚜(빨깐뚜껑 소주)를 곁들인.
다시 <시즌2>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요리사란 정말로 누구인가? 생존을 위해 거를 수 없는 끼니를 만드는 사람. 사랑받는 음식을 팔아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가. 더 나아가 명예와 자아실현을 위해 기술을 갈고닦는 장인. 듣고 보지 체험하지 않아도 죽지 않는 다른 예술과 달리 요리는 일상상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지만 박물관에 전시할 수도 없고 맛을 보지 않고는 평가가 어렵다. 세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는, 어쩌면 유일무이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직업군의 작업물을 TV로 보는 시청자가 예술로 인정하며 보편적으로 공감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우승 인터뷰에서 최강록은 우승을 준 의미가 뭔지를 빨리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전국에 숨어서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요리사분들, 음식을 만드시는 일을 하시는 분들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며 그분들을 대신해 나와 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고 자만하지 않겠다는 다짐. 마지막 대결의 주제였던 ‘나를 위한 요리’는 요리사란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지만 매일 같은 일을 묵묵히 해내는 모든 노동자에게 보내는 따스한 위로가 담겼다. 맛을 볼 수 없다는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직업과 직종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 감동을 전한 요리가 예술이 아니면 무엇이 예술일 수 있으랴.
며칠을 준비한 음식이어도 먹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는다. 요리는 어차피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음식도 박물관에 전시해놓을 수는 없으니 기본적으로 소멸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게 요리다. 오히려 빨리 사라지면 기분이 더 좋다. 방치되지 않고 갓 만들어낸 좋은 상태에서 누군가의 손이 먼저 찾아간다면 요리의 목적을 다한 것이다. 그렇게 적절한 타이밍에 사라지게 하기 위해 우리는 요리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닐까? (최강록,『요리를 한다는 것』중에서)
<프렌치 수프>의 도댕은 ‘하나의 맛을 완성하려면 문화와 기억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음식이 문화와 기억으로 남을까. 접시가 깨끗해지는데 몇 분 걸리지 않는 것처럼, 모든 요리를 하나하나 맛보던 두 명의 심사 위원이 부러웠던 순간도 세월이 흐르며 기억 속에 흐릿해질 것이다. 하지만 우승자 최강록의 마지막 디쉬. 이름마저 담백한 깨두부를 넣은 국물 요리만은 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다. 요리라는 문화에 깊이를 더하고 감동스러운 기억을 불어넣은 요리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재도전해서 좋았다.’이다. 그의 재도전으로 우리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