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는 역대 최고의 서부영화 중 한편으로 꼽힌다. 하지만 배급사인 MGM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영화 100, 《엠파이어》가 선정한 최고의 영화 500 중 14위에 오른 이 영화의 배급을 포기할 뻔 했다. 헨리 폰다(Henry Fonda)가 악역으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가을하늘처럼 파란 눈이 트레이드 마크인 헨리 폰다는 <젊은 링컨>에서 젊은 시절의 링컨을,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시민 역을 맡을 정도로 미국인이 생각하는 선량하고 정직한 이미지의 대표배우였다. 그런 헨리 폰다가 <옛옛서>에서 연기한 프랭크는 재미삼아 살인을 하고 이익을 위해 꼬마아이를 포함한 일가족을 몰살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천하의 악당이다.
반면 프랭크를 단죄하는 정의의 총잡이 ‘하모니카맨’ 역할은 찰스 브론슨(Charles Bronson)에게 돌아간다. 찰스 브론슨은 리투아니아 이민자 출신으로 묘하게 아메리카 원주민의 느낌을 갖고 있어 데뷔 초에는 주로 백인을 습격하는 인디언 같은 악역으로 활약했다.
이렇게 백인=선역, 비백인=악역이라는 공식을 뒤엎은 파격적인 캐스팅은 서부극의 클리셰를 박살내며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고 훗날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역사에 남는 걸작이 된다.
배우 이미지에 타격이 가지 않겠냐는 주변의 걱정에 헨리 폰다는 ‘여러 배역을 하는게 배우다’라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프랭크 역의 헨리 폰다
하모니카맨 역의 찰스 브론슨
2.
위의 상황과 완전 똑같지는 않지만 20대 초반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73년에 나온 영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고 깜짝 놀랐다. 흑인배우인 칼 앤더슨이 유다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와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백인배우였다.
그런데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동명 뮤지컬이 원작인 이 영화는 설정이 범상치 않다. 반전(反戰)을 모티브로 삼아 예수의 죽음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와 제자들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로마병사들은 기관총을 차고 헬멧을 쓰고 경비를 선다.
심지어 유다가 배반을 모의할 때는 사막 저편에서 탱크가 몰려와 반란군의 머리통을...이건 아니고 하여튼 그런 작품인데, 그런 현대적 사물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거의 10년 만에 영화를 검색해보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유다가 흑인인 건 또렷했는데 말이다.
유다 역의 칼 앤더슨
예수를 연행하는 로마병사들
3.
디즈니 <인어공주> 실사영화에서 에리얼을 연기하게 된 흑인배우인 할리 베일리의 캐스팅을 두고 논란이 식지 않고 있다. 원작자가 덴마크인인데 어떻게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있냐고도 한다. 마치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이 악당이 될 수 있냐고 반발하고, 가롯 유다가 흑인이라고 놀란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디즈니 원작을 따지고 보면 캐스팅의 당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어공주>의 메시지가 뭔가. ‘평범한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되는 이질적 존재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고난을 겪고 이를 극복하는 것 아닌가. 그 과정에서 이질적 존재에 편견을 가진 주변 인물들도 반성하고 변화해가고.
이 인간과 인어의 관계를 지금도 무수히 벌어지고 있는 백인과 유색인종으로 바꾸면 너무 간단히 성립해서 흔하기까지한 이야기가 된다. 흑인인어공주를 백인왕자가 데려가면 반대가 심할 거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반대가 심하면 심할수록 결말부의 카타르시스는 증폭된다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인가싶다.
사실 창작자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시각요소는 이야기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건데 이미 물릴 대로 물린 인어공주 이야기를 애니메이션 그대로 올리는 건 기술자가 할 일이지 창작자가 할 일은 아니다(물론 기술은 창작의 기본이고 기술 자체도 창작이 될 수 있다).
헤임달 역의 이드리스 엘바
발키리 역의 테사 톰슨
4.
그렇다면 인어공주 캐스팅 문제는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 설익은 생각을 말하자면 이렇다.
MCU <토르 시리즈>에서 헤임달과 발키리는 너무 명백한 북유럽신화의 등장인물임에도 흑인배우 캐스팅이 논란이 크지 않았다. 이유는 테사 톰슨과 이드리스 엘바라는 예쁘고 잘생긴 흑인. 즉 본인들의 미적기준을 통과한 흑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따라서 지금의 논란은 과도한 PC함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실은 외모지상주의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다만 ‘저 인어공주는 너무 못 생겨서 내가 생각하는 에리얼이 될 수 없어’라는 몰상식한 외모비하를 예전처럼 대놓고 할 수 없으니 안데르센과 디즈니의 원작을 언급하며 당시 덴마크에 흑인이 없었네, 에리얼의 트레이드마크는 빨간머리와 하얀 피부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 따지면 안데르센 원작에서 물거품이 됐어야 할 인어공주가 디즈니에서는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모순부터 해결해야 한다.
새로운 인어공주로 캐스팅 된 할리 베일리
5.
이번 캐스팅과 관련된 감동적인 글이 기억난다. 빨간머리가 콤플렉스이자 놀림거리였던 어떤 사람이 <인어공주> 개봉 이후에는 빨간머리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며, 흑인소녀들도 똑같은 경험을 하길 원한다는 글이었다.
흑인은 에리얼이 되면 안 된다는 댓글 하나가 흑인소녀들. 나아가 에리얼을 꿈꾸는 다른 인종의 소녀들의 꿈마저 꺾는 일이 된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디즈니 영화에서 모두가 기대하는 것도 환상적인 세계에서 펼쳐지는 꿈과 희망이지 하얀피부를 가진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남미녀뿐은 아닐 거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