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와 '체화'의 실패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비교하면 가장 재미있는 영화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마침 《씨네21》 1210호 ‘기생충 비평 기획’에서도 함께 보기 좋은 영화에 <의식>을 포함시켰다.
나 같은 사람이 떠올릴 정도니 내공 깊은 기자들의 선택을 피해가는 게 더 어려웠을 것 같다. 다만 내가 재미있게 본 포인트는 《씨네21》의 기사와는 좀 다르다.
이제부터 진행할 이야기에는 당연히 <기생충>, <의식>에 대한 무지막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다.
1.
두 영화의 공통점은 ‘고용주 살해‘다. 900만 관객을 돌파한 <기생충>은 건너뛰고 생소한 <의식>의 스토리를 보자. 주인공 소피(상드린 보네르)는 릴리브르 가족의 가정부다. 릴리브르 가족은 프랑스의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급이다. 다만 부르주아다운 교양 있는 말투와 표정을 지으며 무례한 행동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영화 내에서는 악당에 가깝다.
그리고 조용하며 내성적인 가정부 소피에게는 결정적인 비밀이 있다. 이 가족에게 본인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취업한 것이다. TV에서도 오페라를 관람하며 주말에는 파티를 즐기고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이 가족에게 소피는 항상 주눅 들어 있다.
소피의 해방구는 어딘가 이상하지만 쾌활하고 거침없는 우체국 직원 잔느(이자벨 위페르)다. 하지만 릴리브르 가족의 가장 조르주는 소피가 잔느와 함께 다니는 걸 싫어한다. 잔느가 본인의 우편물을 뜯어본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조르주의 딸 멜린다가 소피의 비밀을 알게 되고 본인이 글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선다. 소피는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면 멜린다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터트리겠다고 협박하고, 당황한 멜린다는 부모에게 소피의 비밀을 일러바친다. 억울하게 해고된 소피는 잔느와 함께 릴리브르 집에 숨어들어 엽총으로 가족을 몰살한다.
2.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의 꼭지가 돈 지점이 ’냄새‘였다면 <의식>에서는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소피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곧 언어를 잃었다는 강력한 상징이다. 소피는 집안일의 스페셜리스트지만 책과 서류에는 손을 대지 않고 서재에는 발길도 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책장을 엽총으로 쏴버리기까지 한다.
조르주와 대판 싸우며 기세를 보여주는 잔느도 사실 열등감이 있다. 잔느는 본인이 몰던 자동차가 고장이 난 상황에서 우연히 멜린다와 마주친다. 기계에 관심이 많다는 멜린다는 잔느의 자동차를 고쳐주는데, 잔느는 뜬금없이 자기는 기계보다는 시에 관심이 있다며 나중에 시집을 내겠다는 허세를 부린다.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의식>에서 소피와 잔느는 언어를 잃거나, 부르주아의 문화를 동경한다. 하지만 <기생충>은 반대다.
반지하에서 필라이트를 마실지언정 기택의 가족은 박 사장의 가족을 깔끔하게 속여 넘길 만큼의 언어사용에 능수능란하다. 기정은 웹서핑으로 훑은 미술치료에 대한 지식으로 고등교육을 받았음이 분명한 연교를 단숨에 속여 넘긴다. 기우(최우식)은 뼈대 있는 집안의 민혁(박서준)에게 ‘대학와서 술 처먹는 씹새끼들보다 네가 더 잘 가르칠걸?’이라는 인정 아닌 인정을 받는다. ‘38선 이남은 빠삭하다’는 기택이나 입주하자마자 상류층의 집안일을 능숙하게 돌보는 충숙(장혜진)은 말할 것도 없다.
지하실의 가족은 한술 더 뜬다. 문광은 ‘자기가 사모님인줄 알아’라는 소리를 듣고, 근세는 ‘저분들이 뭘 알겠어’라며 예술적 터치를 논한다. 어찌 보면 사업으로 바쁜 박사장보다 남궁현자 선생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건축물을 향유하는 건 근세와 문광일지 모른다.
3.
<의식>의 프랑스 원제 ‘La Cérémonie’이다. 사형수가 단두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가리키는 프랑스 속어라고 한다.
계급질서에 저항하고 사회와 불화하던 <의식>의 두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은폐하려던 사건이 경찰에게 발각되는 걸 암시하는 장면으로 끝을 맞이한다. 주류의 질서를 자연스럽게 체화하고 적극적으로 그 질서에 편입하려던 <기생충>의 가족들은 같은 빈곤층이 휘두른 폭력에 희생되거나, 사형수가 단두대에 오르듯 스스로 지하실로 향하며 사회적 죽음을 택한다.
1995년의 <의식>, 2019년의 <기생충>은 약 사반세기의 시차를 두고 있다. 경로는 확연히 다르지만 결국 주인공들의 생물학적, 사회적 죽음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목적지에서 기다리는 건 주류 체제와 불화해도, 주류에 편입되려고 규칙을 체화해도 비주류에게 허락된 건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라는 무기력과 필연적 죽음뿐이라는 단두대인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불화와 체화 모두에게 실패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일까. <의식>과 <기생충>을 잇지만 맥락을 달리하는 이야기가 새롭게 등장하려면, 혹시 봉 감독의 계산대로 기우의 수입으로 박 사장의 집을 사기 위해 필요한 53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는 아닐지. 새로운 이야기를 위해서라도 ‘근본적 대책’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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