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싫어했던 이유 feat. 엄마의 꾸중

by 이승민

송숙희 씨가 지은 [초등 첫 문장 쓰기의 기적]이라는 책을 읽었다. 글쓰기에 대한 책을 보려고 우연찮게 밀리의 서재를 뒤적이다 발견한 책이다. 초딩은 아니지만 글쓰기 초보라는 위치성이 그와 같기에 초딩에 빙의되어 읽어나갔다. “초등학교 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지 않으면 그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글을 쓰기 어렵다”라는 구절이 뇌리에 와 박힌다.


어릴 때 글쓰기가 두려웠던 나는 이미 성인이 되어버렸다. 아 이제 나는 글을 쓰기 어려운 것일까. 자포 자기 심정으로 나의 초딩 시절 글쓰기를 회상해본다. 우선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나는 대체로 싫어했다. 책상 의자에 앉아서 뭘 하려고 하면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근질근질해 참을 수가 없었다. 글쓰기도 진득하니 앉아서 써야 하므로 싫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책에 나오는 다른 이유로도 나는 글쓰기가 싫고 두려워 글을 쓰지 못했다. 저자는 똑똑한 아이일수록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이유는 글은 산수 문제처럼 정답이 없기에 늘 미완성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오답을 적어 엄마에게 혼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꾸중이 두려운 아이는 글쓰기도 두렵다는 것이다. 내가 똑똑한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에게 혼날 일을 만들지 않는 것. 이것은 내 어릴 적 인생 모토였다.



어릴 적 엄마에게 혼날 이유는 많았다. 밥을 많이 먹으면 식탐이 많다고 혼났고, 적게 먹으면 깨작 된다고 꾸중을 들었다. 늦게 자면 일찍 자야 키가 큰다고 한소리 들었고, 일찍 자면 사당 오락을 들먹이며 잠이 많다고 핀잔을 주었다. 일찍과 늦잠은 고작 한 시간 내외, 기준은 즉슨 엄마 마음대로라는 말이다. 그때는 그것을 몰라 엄마 기준에 딱 맞춰 혼이 나지 않으려고 부단히 도 애를 썼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에 따르면 엄마는 전형적인 히스테리 심리구조를 지녔다.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즉 불만족한 심리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그녀가 자신의 심리를 만족시키는 방법이다. 그러하기에 모든 면에서 나는 늘 불만족스러운 존재여야 했고, 엄마의 꾸중과 매질은 이런 모자란 나를 훈육시키는 좋은 구실이었다. 내 학교 생활 역시 혼낼 구실에 포함됐다. 내 과제를 도와준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엄마는 내 숙제들을 검사 아니 검열했다. 특히 글짓기 과제를 엄마가 보게 되는 날에는 으레 매타작이 밤새 이어졌다. 맞아서 벌겋게 퉁퉁 부운 손바닥으로 동이 틀 때까지 엄마가 고치라는 데로 문장과 단어를 바꾸었다.


어느 날이었다. 날아오는 구둣주걱을 피하다 손톱에 시커멓게 피멍이 들었던 독후감 과제가 있던 그날.. 에 나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다음날부터 모든 글짓기 숙제는 친구들 것을 베껴 냈다. 그렇다고 해서 매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쓴 글’=나 때문에 맞거나 혼나지 않아서 좋았다. 더 이상 엄마는 내 글을 비아냥 거리지도 못할 것이고, 나는 그냥 남의 것 베끼는 도덕성에 문제 있는 아이로 비난받았다. 나도 꾸중을 들어도 되는 핑계를 만든 것이다. 매는 맞아도 마음은 편했다.


엄마의 심리가 이해되는 나이에 들어서야 나는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 진득함은 세월로 배웠고, 엄마에게 혼나지 않을 아니 그녀의 비난에 맞설 용기가 생긴 지금에서야 나는 글쓰기를 싫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하지 못했던 아니할 수 없었던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상처를 보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채운다. 송숙희 씨가 왜 글쓰기의 ‘기적’이라고 했는지 짐짓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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