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집중하기 전 준비시간을 최대한 줄여라”.
박문호 박사가 공부법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글쓰기에 관한 팁을 얻는다. 프랑스 사람들은 식욕을 돋우는 에피타이저, 식전음식을 먹어야 본 식사를 시작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바로 책상에 앉자마자 글이 술술 나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 자신만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낸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글이 나오게 자기 상태를 만드는 시간이다. 누구는 초콜릿·커피로 당과 카페인을 충전해 집중을 위한 몸을 만들고, 다른 이는 깊은 명상을 통해 번잡스러운 마음을 청정히 한다. 그에겐 글쓰기가 마음을 읽는 과정이기에 마음을 닦는 것이 먼저다. 모두 글쓰기 전 준비과정이다.
내 준비시간은 꽤 길다. 뭐 쓸까 글감만 생각해도 벌써 냉장고 문을 대 여섯 번은 열어 이것저것 먹어제꼈고, 이제 한 줄 써볼까 하면 이미 마셔버린 커피잔이 수두룩하다. 두어줄 썼나 싶으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아 이 바보 멍충이! 잤는지도 모르게 자고 있었네’라며 자괴감에 시달린다. 잠이 온다는 것은 뇌가 이미 집중하는 모드로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뇌 과학자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몸은 준비가 되었는데 다른 준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쓰자며 노트북을 열다. 머리칼까지 뒤로 찰랑 넘기며 호기롭게 크고 굵은 글씨로 제목부터 타이핑한다. 이제 주제는 잡았고, 이 글감이 적당할까 싶어 리서취를 좀 해야지 하고 검색 엔진을 켠다. 짧게는 기십뿐 길게는 몇 시간 후, 모르는 연예인들의 이혼부터 시작해 북극의 기후 변화까지 섭렵해 정보 왕이 되어버린 또 다른 내가 목격된다.
‘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후회 해봤자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을 수 없다. ‘한 시간에 한 문단 쓸 거 까짓거 한 시간에 두 문단씩 쓰는 거야’ 하면서 시간 부족을 허황된 자신감으로 메꾸려 한다. 한 시간 후 한 문단도 쓰지 못한다. ‘후…. 괜찮아….’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토닥토닥하며 다시 시간 계획을 세운다. ‘이번에는 진짜 두 문단 쓸 수 있을 거야. 화이팅! 그래 할 수 있어!’. 이러느라 또 시간이 지체되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스스로를 격려한다.
한 시간 후, 위를 올려다본다. 한 문단이 겨우 쓰여 있다. 맘에 안 든다. 윗이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분노의 DELETE를 연신 누르다 깨닫는다. ‘제목까지 지워버렸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인가? 하루종일 지금껏 뭐한 거야. 이럴 거면 지영이가 나오라고 할 때 그냥 놀고 오는 건데…’ 차라리 놀아서 쓰지 못했다면 이렇게 허무하지 않을 텐데…. 한 줄도 건지지 못하고 보낸 하루가 이제 억울하기까지 하다. ‘우울하다…. 미쳐버리겠네…. 어떡하지….’
나빠진 기분을 상대하노라니 글 쓸 기력도 사라져 버린다. 이건 뭐 애피타이저를 먹다가 배가 너무 불러서 메인 메뉴는 손도 못 댄 형국이다. 이런 나에게 박문호 박사의 글쓰기 준비시간을 줄이는 팁은 너무 유용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쓰지 말고 타이핑 하세요.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잖아요.’ 뭘 쓸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잘 쓰고 있나 점검하지도 말고 그냥 마치 기계적으로 손가락이 움직여 타이핑을 하라고 한다. 일단 막 쓰고 보자 이거다. 이건 어렵지 않지 하며 타이핑을 시작했다. 일단 생각 없이 써보자. 한 줄도 안나오는데? 순간 애국가나 주기도문 같은 걸 써야하나 생각했지만 이것은 내 글이 아니니 의미 없어 보였다. 자유연상 기법에 따라 생각나는 대로 써본다. 아무거나 썼더니 진짜 아무말 대잔치가 되었다. 주어 서술어가 자기 방식대로 뛰어놀아 글이라고 할 수 없는 비문들도 꽤 있었다.
그렇다고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쓰기를 하고 나면은 타이핑 하는데 몸이 익숙해져 글쓰기 전 준비과정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게 느껴진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단 ‘아무글쓰기’로 반을 해놨으니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조금 더 수월하겠지. 아직 시작 단계여서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누군가 나처럼 글쓰기 전 준비과정이 길고 고통스럽다면 일단 타이핑을 시작하라! 피아노 연습할 때 하농으로 손가락을 풀고 시작하는 것처럼, 아무글 대단치를 벌여 손가락의 긴장을 풀어보자. 술술 글이 써지는 마법이 벌어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