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학부시절 인간발달 시간에 지도교수님이
융의 생애를 설명하셨었다.
융이 심리적 위기를 맞았을 때 돌 쌓기라는 놀이를 통하여
위기를 지나갔다고. 그러니 놀이가 얼마나 중요하냐교
모든 고전은 알지만 읽기는 어려운 법인데
어쩌다가(아마 이터널 저니에서 본 책 같다)
융의 자서전을 읽게 되었다.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다.
옮긴이를 보니 소설가 조성기이다.
학교 다닐 때 몸담았던 서클 선배이기도 하다.
서클에서 만난 적은 없으나 그에 관한 소설을
내가 그 서클을 나올 때쯤 읽었었다.
내가 경험하였으나, 막연히 알았으나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을
소설로 보았을 때의 충격.
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융의 저서와 관련 저서를 닥치는 대로
다 읽고 뭔가 막연히 잡히려는 때, 이 작가의 번역을 보니
왜, 인생의 특이점에서 이 사람의 글을 만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설하고,
위대한 융의 자서전에 이러쿵저러쿵 떠들 말은 없고
웬만하면 그냥 읽는 내가 줄 친 부분만 옮겨 놓겠다.
... 그 외에 또 다른 생각에도 나는 몰두하고 있었다. 사원으로 다가가는 동안, 나는 내가 밝아진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과 내가 실제로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
에서 나는 마침내 나 자신 또는 나의 인생이 어떤 것과 역사적으로 관련되어 있는가를 이해하게 되리라 또한 확신했다. 나는 무엇이 내 이전에 있었고 왜 내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내 인생이 어디로 계속 흘러갈 것인지 알게 될 것이었다.
이 부분은 융이 본 환상의 내용이다. 어느 계단에 다가갔을 때 융은 생에서 겪은 모든 것들이 벗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가 마음먹고 바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 세속적 생활의 모든 환각이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거나 제거되었다. 그것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그런 중에도 뭔가 남은 것이 있었다. 그가 일찍이 살면서 경험하고 행한 것, 그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지금도 나에게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융의 참된 자아이기도 했다.
그 꿈과 환상에서 체험한 객관성은 완성된 개성화에 속한다. 그것은 가치평가라든가 우리가 감정적인 유대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감정적 유대는 대체로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투사를 포함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이 되고 객관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투사를 회수할 필요가 있다. 감정적인 관계는 강요와 예속으로 부담을 주는 열망의 관계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그로 말미암아 상대방과 우리 자신이 부자유하게 된다. 객관적 인식은 감정적인 연관성 너머에 있다. 이 사실이 중요한 비밀로 여겨진다.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만 진정한 융합이 가능하다.
투사와 객관적 인식. 감정적 유대에서 투사를 걷어내고 객관적 인식으로 나가야 진정한 융합이 가능하다. 그럼 도인이지.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연속성이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숙명의 의도를 주제넘게 간섭하지 않을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진리를 견디며 서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란 어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