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숨

―― 하루가 스며드는 자리에서

by 시우

퇴사 후의 첫 월요일,
나는 여전히 같은 시각에 눈을 떴다.
몸은 습관대로 움직였지만,
세상은 아무 일도 시작하지 않았다.

달력의 숫자는 빛을 잃었고,
시계의 초침만이 묵묵히 돌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간다고 믿어왔지만
그날 알았다.
시간은 멀리 달려가는 강이 아니라,
조용히 내 곁에 머무는 공기라는 것을.


멈춤은 두려움이었으나,
두려움이 가라앉자 그 자리에 숨이 남았다.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숨.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같은 시각에 물을 올렸다.
끓는 소리의 고요 속에서
찻잎이 천천히 풀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그 기다림 속에서
시간은 조금씩 얼굴을 드러냈다.


물이 너무 뜨거우면 잎은 금세 지쳤고,
식혀 주면 향이 깊어졌다.
그 미묘한 온도 차 속에서 나는 배웠다.
시간은 밀어붙일수록 달아나고,
놓아줄수록 다가온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시간을 ‘쓴다’고 믿었다.
무언가를 끝내야 하루가 존재했고,
남긴 기록만이 나의 증거였다.

시간은 손끝에서 흘러나갔고,
나는 그 잉크가 마르기 전에
다음 문장을 써야 했다.


그러나 퇴사 이후,
시간은 종이 위에서 사라졌다.
책상 밖으로 밀려난 그 시간은
내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어제의 침묵이 오늘의 언어가 되고,
오늘의 망설임이 내일의 표정이 되었다.
그 느린 결을 따라가며
나는 조금씩 나로 돌아왔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었다.
돌아보면 제자리 같지만,
한 겹 더 깊어진 나로 서 있었다.

보이차의 잎이 물속에서 천천히 풀리듯,
삶도 자기의 향을 내기까지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서두름은 향을 죽이고,
머무름은 향을 살린다.
그 느림 안에서만
삶은 제 온도를 되찾는다.


밤이 오면
나는 창문을 연다.
덜 마른 바람의 냄새,
식어가는 말들의 여운,
오늘의 그림자가 천천히 벽을 건너간다.

그 공기 속에 하루가 스며 있다.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으나,
그 무형의 시간들이
나를 천천히 빚어 왔음을 느낀다.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내가 너무 빨리 지나칠 뿐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면,
잊었던 숨결이 돌아온다.
그 고요 속에서
하루는 다시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하루가 저문다.
남은 초의 불빛이 작게 흔들린다.
그 빛 속에 오늘이 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조용히 나를 바꾼 시간.
나는 그 시간 안에 머문다.

숨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살아 있는 채로.


어쩌면 시간은
나를 스쳐가는 흐름이 아니라,
나를 통해 자신을 완성해 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내가 멈추면 시간은 숨을 고르고,
내가 숨을 고르면 시간은 다시 살아난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잠시 고요해진다.
말보다 느린 깨달음이 내 안을 지나가고,

나는 다만 그렇게 살아 있을 뿐이다.


시간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 나를 놓아두는 일로.


By 시우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