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세계와 잊힌 나에 대하여
어떤 날은 글을 올리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휴대폰을 다시 켠다. 몇 개의 ‘좋아요’가 눌렸는지, 누가 댓글을 달았는지—그 사소한 반응이 하루의 온도를 정하기도 한다. 숫자가 오르면 잠시 안심하지만, 오래 정체되면 마음이 식는다. 누군가의 짧은 머묾이 내 존재를 승인하는 의식처럼 느껴질 때, 문득 궁금해진다.
‘좋아요’는 정말 ‘좋아요’일까?
왜 나는 그것을 단순한 호감의 표시가 아니라 존재의 확인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화면에 머무는 잠깐의 시선이 사회가 나를 ‘유효한 존재’로 등록하는 절차처럼 느껴지는 이 감정은 개인의 심리가 아니라 오래된 정치적 언어가 감정의 구조로 이행한 결과다. 정치학에서 인정(recognition)은 본래 공동체가 개인을 제도적으로 승인하는 행위를 뜻했다. 정부의 지지율, 의회의 표결, 정당의 득표율—모두 공적 승인(public approval)의 장치였다. 그러나 지금의 ‘승인’은 더 이상 제도나 시민의 의사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스마트폰 화면 속으로 축소되어, 감정의 통치(emotional governance) 형태로 일상 속에 내재되었다. 이제 인정은 제도가 아니라 플랫폼의 설계를 통해 작동한다. 퇴근길 지하철, 카페의 작은 테이블, 침대 머리맡의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인정받을 만한 나’를 연출한다. 적당히 기분 좋은 표정, 과하지 않은 문장, 어수선함이 지워진 배경. 그것은 소통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시선이 불균등하게 분배되는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검열이다. 결국 이 모든 행동은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를 보셨나요?”
‘좋아요’의 체계는 이제 일상의 미시정치적 투표 행위가 되었다. 이 공간에서 인간은 유권자가 아니라 ‘보이는 자’이자 ‘보여야 하는 자’로 존재한다. 누가 더 오래 보이는가, 누구의 삶이 더 자주 회자되는가—이 가시성의 서열 구조가 새로운 인정 질서를 만든다. 그 꼭대기에는 언제나 ‘타인의 욕망을 가장 효율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나 또한 그 질서 바깥에 있지 않다. 보임은 곧 생존의 언어가 되었다. 플랫폼은 새로운 권력의 형태다. 그 속에서 ‘좋아요’는 더 이상 호감이 아니라 존재의 통화(currency of being)로 작동한다. 보이지 않으면 사라지고, 반응이 없으면 존재의 열이 꺼지는 듯하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가시성의 경제(visibility economy)가 감정의 흐름을 재편한 결과다.
가끔 나는 글을 올리고 곧바로 지운다. 한 문장이 너무 단정적으로 느껴졌는지, 사진 속 그림자가 마음에 걸렸는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불편한 감정이 남는다. 그 망설임 사이에서 ‘보여줄 나’와 ‘숨길 나’가 갈라진다. 그때 깨닫는다. 인정은 본질적으로 교환의 문법 위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좋아요’를 받기 위해 ‘좋아요’를 주고, 반응을 얻기 위해 먼저 반응한다. 우리는 서로를 응시하며 후원하지만, 동시에 소비한다. 말하지 않으면 잊히고, 침묵은 존재의 소멸처럼 남는다. 그래서 더 자주, 더 빨리, 더 많이 반응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언어가 감정의 그릇이 아니라 생존의 도구로 기능하기 시작하면, 남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숫자일 뿐이다.
그럴 때 나는 오래된 노트를 펼친다. 반응을 예상하지 않고 적어 둔 문장들,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진짜 나에게 묻는 질문들, 끝내 다듬지 못한 낙서 같은 문장들. 거기에는 좋아요도 공유도 조회수도 없지만 어딘가 구겨놓은 내 마음 한 칸이 오롯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임이 줄어들면 의심이 찾아오고, 의심은 불안으로, 불안은 다시 보임의 욕망으로 돌아온다. 이 반복이 감정의 피로와 자기 소진을 낳는다. 숫자는 편리하지만 잔혹하다. 차이를 보여주되 이유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밤, 알림이 오지 않는 휴대폰을 엎어두고 창문을 열었다. 멀리서 플라스틱이 자루에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캔이 부딪히는 금속성, 종이가 눌리는 둔탁한 마찰. 그 소리에는 좋아요도 공유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내 하루를 가장 정확히 증언하고 있었다. 오늘 마신 커피, 읽다 만 책, 미뤄둔 전화—그 사소한 기록들이 연쇄적으로 떠오르며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때 알았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는 여전히 나를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습관을 조금 바꾸었다. 숫자를 확인하지 않고 잠들고, 반응을 기대하지 않은 채 글을 쓰며,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나를 감각하려고. 이 느린 행위들이 보이지 않는 나의 존속을 증명하는 일종의 내면적 정치 행위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는 ‘보이는 곳에서만 존재가 증명된다’는 믿음을 너무 오래 배워왔는지도 모른다. 그 믿음이 우리를 ‘인정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길들였다.
그러나 존재는 그렇게 단순히 증명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시간, 반응이 닿지 않는 순간에도 사람은 생각하고, 느끼고, 견디며 살아간다. 그래서 지금의 나에게 ‘괜찮음’은 상태가 아니라 감각의 자립이다. 외부의 시선으로 측정되지 않는 온도, 비교와 불안의 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속도로 호흡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시성의 시대를 통과하며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식이다. 결국 괜찮음은 외부의 인정으로 보증받는 표지가 아니라, 어떤 승인도 없이 사라지지 않는 존재의 자가 증명이다.
그러니 이제,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존재는 이미,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조차 조용히 나를 증명하고 있으니까.
2025.11.04.
글.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