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는 우리를 구속할까, 보호할까

구속을 견디며 보호를 얻는 삶의 구조에 대하여

by 시우

우리는 평생을 제도 속에서 산다. 태어나는 순간 가족이라는 가장 오래된 제도에 들어가고, 조금 큰 뒤에는 학교라는 구조 속에 편재된다. 성인이 되면 회사와 시장이 우리의 시간을 관리하고, 결혼·세금·건강보험·학계·노동조합 같은 제도적 장치들이 삶의 토대를 만든다. 인간은 제도 밖에서도 숨을 쉴 수 있지만, 완전히 제도의 경계를 벗어나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제도는 우리를 구속할까, 보호할까라는 질문은 정치학을 오래 공부한 사람에게도 결코 단순한 양자택일이 아니다. 제도는 언제나 양면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는 우리를 제한하지만, 그 제한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에게 훨씬 더 잔혹해질 수도 있다. 제도는 우리의 자유를 줄이지만, 그 축소된 자유 덕분에 다른 더 큰 자유가 지켜지기도 한다.


학교는 학생을, 회사는 직원의 시간을, 결혼은 두 사람의 관계를, 학계는 지식의 생산 과정을 제도라는 울타리 안에 넣는다. 우리는 그 안에서 역할을 배운다. 제출해야 할 시간, 책임져야 할 문장, 감당해야 할 업무, 지켜야 할 윤리. 제도는 일정한 구속을 통해 인간을 협력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하지만 이 ‘구속’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을까? 아마도 경쟁, 혼란, 무력감, 그리고 무너지는 관계들일 것이다. 퇴근 시간도 없는 노동, 규칙 없는 회의, 경계 없는 가족 관계. 제도가 없는 자유는 종종 가장 약한 사람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제도는 우리를 구속하지만, 그 구속이 삶의 바닥을 만들어준다.


정치철학자 푸코는 권력이 언제나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길들인다고 말했지만, 그 길들임에는 강제만이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스스로 제도에 협조하며, 제도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고, 그 설명 속에서 안정을 찾는다. 학계의 심사 시스템에 불만이 있어도, 우리는 그 제도를 통과한 논문에 신뢰를 둔다. 회사의 규칙이 불편해도, 그 규칙이 없으면 일의 구조가 무너진다. 결혼이 제약처럼 느껴져도, 그 제약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조율한다. 자발적 복종은 권력에 대한 패배가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오래된 습관이다. 우리는 구조 없이 혼자 서 있는 일의 고단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복종이 반복될수록 그 선택이 ‘자율의 얼굴을 한 강제’로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학교의 규범은 학생을 길들이고, 회사의 규율은 직원의 몸을 관리하며, 학계의 관행은 연구자의 감각을 훈련한다. 제도는 우리가 스스로 복종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제도의 가장 은밀한 권력이다.


한창 논문 실적 압박을 받던 시절의 노트를 다시 펼쳐보니, “이 제도를 벗어나고 싶다.”는 문장이 반복적으로 적혀있었다. 정해진 연구 기한 내에 내용의 퀄리티와 무관하게 논문의 양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압박은 내 일상의 거의 모든 리듬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매일 “자유롭게 연구하고 싶다”라고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제도가 설정한 달력과 기준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연구비 신청 일정, 프로젝트 마감, 연차보고서 심사 주기, 학술지 심사일정—어느 하나도 내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내 시간표는 이미 제도가 그려 둔 지도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그 지도의 경계를 넘지 못한 채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이 커질수록, 나는 제도 밖을 상상했다. 하지만 막상 소속을 떠나고 보니, 그 자유는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형태로 다가왔다. 건강보험이 사라지고, 매달 들어오던 급여가 끊기자 나의 취약함이 너무도 빠르게 드러났다. 그제야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벗어나고 싶다고 외쳤던 그 제도가 사실은 나를 억누르면서도 동시에 지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제도는 나를 제한했지만, 그 제한이야말로 불확실한 세계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안전망이었다. 그래서 제도를 떠나는 순간 자유가 아니라 불안정이 먼저 찾아오는 것이다. 이 모순은 제도에 대한 인간의 오래된 경험을 정확히 드러낸다. 우리는 때로 제도에 질식하지만, 제도가 완전히 사라지면 서로에게 훨씬 더 잔혹해질 수도 있다. 제도는 구속이지만, 그 구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보호도 없다. 이 양가성 자체가 제도의 아이러니이며, 인간이 사회를 이루는 방식의 본질적 구조다. 이 아이러니는 비단 학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결혼에서의 갈등 역시 사랑의 문제에 앞서 규범의 문제이며, 회사에서의 피로는 업무량보다 제도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는 일에서 더 자주 비롯된다. 학계의 번아웃도 지식의 욕망이 고갈되기보다는 평가 구조라는 기계적 질서가 연구자의 감각과 속도를 균질화하려 할 때 시작된다. 그래서 제도는 단순히 규칙의 목록이나 행정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와 권력, 시간과 감정이 뒤엉켜 생성되는 하나의 ‘사회적 장면’이다. 제도는 인간을 관리하고, 인간은 다시 제도를 수정하고 저항하며 재구성한다. 이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늘 긴장 속에서 공존한다. 바로 그 긴장인 구속과 보호, 규율과 안정, 복종과 자율 사이의 미묘한 흔들림이 우리를 사회적 존재로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제도와 함께 살아가야 할까. 제도를 떠나는 순간 자유가 펼쳐질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또 다른 제도가 곧바로 그 빈자리를 메운다. 소속을 벗어나면 회사의 시간표 대신 프리랜서의 불안정이 찾아오고, 결혼의 규범을 거부하면 또 다른 관계의 규칙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자유는 공백이 아니라 또 다른 규범의 형태로 재구성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제도 안에서 살아야 하는가, 벗어나야 하는가’가 아니다. 질문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더 일상적이다. 어떤 제도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을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서 보면 제도는 더 이상 하나의 커다란 벽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제도는 삶을 버티게 하고, 어떤 제도는 우리를 지치게 하며, 또 어떤 제도는 때로는 벗어나야만 비로소 자신의 모양을 드러낸다. 제도와 인간의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유동적 장면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제도를 예전처럼 무겁게 내려앉은 현실로만 보지 않게 되었다. 제도는 우리가 서로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 둔 최소한의 구조이며, 완벽하지 않고 늘 뒤틀려 있으며 종종 폭력적이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협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는 일종의 ‘공통의 바닥’이다. 따라서 제도 속에서 성숙한 자유란 복종 하거나 탈출하는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 있다. 제도를 무조건 따르지 않되,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는 태도. 제도와 대화하고, 때로는 나를 조정하고, 또 때로는 제도와 거리를 두는 감각. 정해진 틀에 자신을 구겨 넣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의 모양을 조금씩 비틀고 유연하게 만들며 함께 살아가는 일.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제도는 우리를 구속할까, 보호할까?”라고 묻는다면, 답은 여전히 둘 다 맞다.

제도는 우리를 제한함으로써 협력을 가능하게 하고, 규율을 요구함으로써 안전을 제공한다. 그러나 아무리 공들여 만들어진 제도라 해도, 우리가 침묵하는 순간 가장 빠르게 경직되고, 우리가 질문하고 조정하려 할 때에야 비로소 천천히 인간적인 얼굴을 되찾는다. 제도는 스스로 완성되는 구조가 아니라, 늘 인간의 개입과 비판, 그리고 조율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유기체와도 같다. 그래서 나는 제도와 거리를 완전히 끊어내지 않는다. 동시에 제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도 않는다. 필요한 만큼 기대되지만, 그 기대가 내 판단을 잠식하지 않도록 한 발쯤 비켜서서 바라보는 태도—나는 그 위치를 지키려 한다. 그 작은 비켜섬이 제도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게 하는 조용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제도는 분명 우리를 구속한다. 그러나 그 구속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지탱한다. 구속 때문에 숨이 답답해질 때가 있는 만큼, 그 구속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순간도 있다. 바로 그 모순의 경계, 구속과 보호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진짜 삶의 정치가 시작된다.


2025.11.18

글. 時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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