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펜 Apr 01. 2018

IF NOT NOW, THEN WHEN?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행복하자

1. 플랜맨(The Plan Man)


태생이 그런 걸까, 아니면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일까. 나는 매사를 꼼꼼히 계획하고, 계획대로 수행하고, 또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나의 이러한 ‘플랜맨’ 성향은 중학생 때부터 진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 중간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자진해서 독서실을 등록했고, 각 시험 일정에 맞춰 공부 계획을 세웠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해당 과목의 시험일 이틀 전에는 모든 공부를 맞출 수 있도록 여유 기간까지 고려해서 공부했다. 실제로 시험 바로 전 날에 편두통으로 공부를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런 습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일관되게 나타났고, 20대 중반에 완벽주의와 맞물리면서 정점을 찍었다.


이 성향은 내 인생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많은 목표를 세우고 실제로 성취할 수 있도록 견인했다. 계획대로 공부하면 웬만한 모든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취할 수 있었다. 장학금도 계획한 대로 따박따박 타냈고 목표했던 해외 인턴 생활도 자발적으로 이루어냈다. 솔직히 말하면 취업도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공부와 계획의 연장선이었기에 그저 내가 계획대로 이뤄온 내용들을 잘 정리해서 지원하면 최소 둘에 한 번은 면접 볼 수 있었고, 작정해서 달려들면 최종 합격할 수 있었다.


이처럼 나는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이루어내는 사람이었다. 하나하나 성취하고 항상 그다음 단계를 생각하고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계획대로 성취해나가는 것이 뿌듯했다. ‘성실함’과 ‘성취’는 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칭찬은 더욱 완벽한 플랜맨이 되기 위한 동력이 되었고, 점점 더 빈틈없이 계획하고 성취하며 만족감을 키워가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만족도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속성과 동력을 잃기 시작했고 결국 엔진이 꺼져버렸다. 번 아웃(Burn Out)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이 패턴이 반복된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2. ‘오늘’을 담보로 ‘내일’을 사는 인간


나는 ‘오늘’을 담보로 ‘내일’을 사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항상 다음을 위해, 또 내일을 위해, 5년, 10년, 20년 후를 위해 ‘오늘’을 포기해왔던 것이다. 가끔 주어지는 여유에도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며 또 다른 계획을 세워버리는데 써버렸다. 레이스 같은 인생에서 뒤처지기 않기 위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럴듯한 모습을 꾸며내기 위해 나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갉아먹어 온 것이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는데, 난 10대 동안 편두통을 달고 살았다. 그때는 그냥 ‘예민한’ 내 유전자의 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보니 끊임없는 계획에 대한 압박감에 몸이 이상 증상을 일으켰던 것 같다. 꽤나 심한 편두통이었다. 시야결손을 동반했다. 전조증상이라고 하는데, 시야에 강한 빛을 보고 났을 때 생기는 반점들이 나타났고, 초점이 안 맞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지럽고 식은땀이 나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이 전조증상들이 끝나면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이었다. 후두부와 관자놀이가 번갈아가면서 깨질 듯이 아팠고, 그런 날이면 약도 들지 않기에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신기한 것은 수능이 끝나고 20대가 되면서 단 한 번도 편두통을 앓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내게도 20대 초반 대학생활은 수능이라는 큰 고비를 하나 넘기고 잠깐 쉬어가는 단계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난 또다시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짜고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플랜맨’ 기질이 기어 나왔고 군생활을 통해 극도로 심해진 강박증과 앙상블을 이루며 나는 야심 차게 더욱 완벽한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했다.


하지만 딱 하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계획이었고 크고 작은 모든 계획의 수렴점이자 최종 목표였다. 그러나 최선을 다할수록, 가장 완벽한 계획을 세울수록,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행복해지자’는 계획이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계획하며 살아왔던 것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행복은 결코 이뤄낼 수도, 만질 수도 없었다. 내가 계획한 행복은 현재가 아니라 항상 미래에 있는 ‘내일의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미래에 좋은 배우자를 얻기 위해, 미래에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하기 위해, 미래에 안락한 노후생활을 보내기 위해’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간 그 ‘행복한 상태’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근본적으로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을, 영원히 느낄 수 없는, ‘절대로 내가 살 수 없는 시점’이었다. 내일만 바라보며 살면, 또 다른 내일이 올뿐이었다. 그 종착지는 내가 가진 시간을 모두 다 써버린 차가운 관 속일 뿐이었다.

 

3. 인생은 점들의 집합, 순간의 연속


애초에 계획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고 타임머신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확실한 내일을 움켜쥘 수 있다고 오판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큰 줄기들은 절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강릉에 살 때는 서울에 살게 될지 꿈에도 몰랐고, 이 전공을 선택하고 졸업하게 될지도 몰랐다. 지금의 분야, 회사에서 일하게 될지도 몰랐다. 계획은커녕 상상도 못 하였던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계획하고 살아가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오랜 시간 착각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 속에서 아래와 같은 구절을 읽게 되었다. (오래되어 책 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A : 어떻게 하면 너처럼 행복해질 수 있어?

B :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냐고?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

A : 도대체 뭐가?

B : ’~해진다’라는 것은 특정 시점부터 그 상태가 쭉 지속된다는 것을 말하지. 하지만 행복은 그런 게 아니야.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얻고,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집에서 살게 된다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해. 그 시점 이후로 쭉 행복이 이어진다고 생각하지. 그런 사람들은 행복을 한없이 이어지는 ‘직선’과 같은 상태라고 착각하는거야. 하지만 행복은 무언가를 얻고 성취해서 지속되는 감정상태가 아니야.

A : 그럼 행복이 뭔데?

B : '직선’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면 결국 수많은 ‘점’들의 집합이야. 인생이나 우리의 행복도 마찬가지야. 수많은 ‘행복한 순간’들만 있을 뿐이지, 영원히 지속되는 상태가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오직 그 순간들을, ‘행복한 순간’들을 많이 만들고 온전히 느끼는 것이 중요해. 그게 진짜 행복이야

 

내 이야기였다. 나는 인생이 그리고 행복이, 영원히 이어지는 직선의 상태라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얻고 성취함으로써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온몸으로 확인했다.) 인생은 결국 점들의 집합, 순간의 연속, 오늘의 연속이었다. 확실한 것은 바로 ‘오늘’뿐이었다.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허황된 것을 쫓아왔는지 깨달았다. 1%도 확실하지 않은 내일의 행복을 잡기 위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100% 확실한 오늘의 행복을 포기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뒤늦게 다짐하게 되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행복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다짐을 해도, 역시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지라, 거기다 더욱더 나약하고 부족한 나라는 인간이라 또다시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래서 난 ‘오늘’을 붙잡고, ‘오늘’을 살기 위해 아래의 글귀를 내 왼쪽 갈비뼈 부근에 새기게 되었다. (심하게 아팠다)


이 타투를 한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플랜맨 기질을 못 버리고 여전히 많은 순간을 내일을 준비하며 살고 있다. 그래도 그 정도가 확실히 줄었다. 무언가 나름 큰 결정을 하거나,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 칩을 아끼지 않고 ‘오늘’에 배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꽤나 효과가 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은 ‘어떻게든 되겠지’였다. 무계획으로 사는 사람들을 혐오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감정은 대상이 잘못된 감정이었다. 그것은 질투이자 미래에 목매달아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였다.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었는지... 다행히도 지금은 어떤 것을 계획해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저 오늘을 열심히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된다'는 것을 안다.


다시 한번 다짐하지만, 결국 확실한 것은 ‘오늘’뿐이다. 확실한 ‘오늘’의 점들을 충실히 찍어나간다면, '오늘의 행복'을 온전히 느끼고 집중한다면, 삶이 충만해질 것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내가 산 오늘이 모여 그려지는 것이니 말이다. 내일 행복해질 것을 계획하지 말고, 그냥 오늘 행복하자. 


‘If Not Now, Then When ?’

작가의 이전글 그래서 나도 나쁜 페미니스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