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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위바위보쌈 Feb 29. 2024

40년 동안 돼지고기만 삶았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세호보쌈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세호보쌈 입구

오랜 시간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게 음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긴 기간 하나의 음식을 집중해서 만들고, 그 맛을 꾸준히 유지한다는 것. 우리는 그들을 '장인'이라고 부른다.


그 음식이 보쌈이라면, 내게는 정말 행복한 일이다. 오랜 기간 보쌈만을 만들고 다루는 장인. 그 장인이 만든 보쌈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정말 즐거운 상황이다.


종로와 을지로, 무교동에 있는 여러 보쌈집들이 그렇다. 오랜 기간 보쌈만을 취급한 곳들이 많다. 여의도 한복판에도 그런 집이 있다. 심지어 이 집은 38년 전통이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바로 세호보쌈이다.


세호보쌈은 샛강역과 여의도역, 여의나루역의 중간 지점에 있다. 굳이 따지면 샛강역에서 더 가깝다. 세호보쌈이 있는 건물에는 맛집이 많다. 조가네 닭한마리나 가양칼국수버섯매운탕, 파파호와 함께 있다. 건물 이름은 홍우빌딩이다.


홍우빌딩 2층에 올라가면 음식점들이 쭉 있는데, 세호보쌈은 중앙계단 앞쪽에 있다. 문이 두 개인데 한 곳은 막혀있으니, 왼쪽에 있는 큰 문으로 들어오면 된다.


세호보쌈 문 옆에는 본인들의 철학에 대한 설명이 담겨있다. 38년 전통, 보쌈에 대한 진심, 김치에 대한 설명. 그것들을 읽다 보면 얼른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세호보쌈 메뉴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측에 카운터가 있고, 앞에는 주방이 보인다. 살짝 꺾으면 넓은 홀이 나오는데, 편한 곳에 앉으면 된다. 메뉴는 벽면에 걸려있다.


수육이 맛있는 집이라 그런지 홍어도 판다. 그래서 가게에서는 홍어 냄새가 살짝 날 때도 있다. 아저씨들이 많은데, 막걸리에 홍어를 곁들여서 드시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밖에 직장인들이 단체로 오기도 하고, 모임을 삼삼오오 갖기도 한다. 점심 장사가 꽤 잘 될 것 같은데, 저녁에만 가봤다. 저녁에는 자리가 꽤 있다.


자리에 앉아서 보쌈을 주문한다. 보쌈 소, 중, 대자가 있고 그밖에 여러 종류가 있는데 3명 이상이서 먹을 거면 무조건 보쌈 대자를 시키는 것을 추천한다. 이유는 나중에.


보쌈을 시키면 5분~10분 정도 걸려 금방 나온다. 고기는 직접 주방에서 썰어준다. 그릇에 정갈하게 무말랭이, 절인 배추와 함께 담겨 나온다.


이제부터 고기와 김치의 시간이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세호보쌈 보쌈 中자

이 집의 고기는 깔끔하다. 수육의 정석에 가깝다. 다들 먹어보면 어디선가 한 번쯤 먹어봤을 맛이다. 하지만 음식점이나 가게에서 먹었다기보다는 어린 시절 김장철에 먹는 고기에 가깝다.


우선 이 집은 '갈비삼겹살'을 쓴다고 알려졌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알아보니 삼겹살 등 여러 부위를 사용한다. 아마 식자재 가격이 상승한 탓 아닐까 싶다. 부위를 선택할 수도 있는데, 부드러운 부위를 달라고 하면 삼겹살을 더 많이 주는 것 같다.


일단 고기는 상당히 부드럽다. 고기 자체는 훌륭한 편이다. 부드러운 것도 좋지만, 맛이 앞에 서술한 대로 깔끔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양념으로 잡내를 없애지도 않았고, 재료를 과하게 투입하지도 않았다. 이런 깔끔은 마늘, 양파, 사과 등 자연스러운 단맛을 내는 재료 등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재료를 굳이 많이 쓰지 않아도 좋은 고기를 쓰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는 맛이다.


질 좋은 고기를 쓰는 탓일까. 양이 너무 적다. 깜짝 놀랄 정도로 적다. 中자가 4만5000원인데, 다른 보쌈집에서 먹으면 2만5000원에 나올 양이다. 심각하게 적어서 셋이서 먹을 때 고기 추가는 필수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수육만으로 따졌을 때 꽤나 맛있는 집일 거라고 생각한다. 고기 맛은 요즘 말로 '클린 앤 깔끔'이다. 돼지고기 본연의 맛을 잘 살리면서도, 나름의 감칠맛도 있지만 오버하지 않는다.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면서 입맛을 지배한다.


아쉬운 건 역시 김치다. 분명히 가게 앞에는 '보쌈김치'라고 적혀 있어서 기대하게 만들지만, 정작 나오는 김치를 보면 무말랭이와 절인 배추다.


그런데 보쌈김치는 이렇게 생긴 게 아니다. 돌돌 말린 배추김치 안에 무와 당근, 잣 등 각종 재료가 들어가 있는 것이 보쌈김치다. 이 집은 보쌈김치를 내세운다고 말하면 절대 안 된다. 이건 그냥 곁가지로 나오는 반찬에 불과하다.


정확히 말해 이 집은 보쌈김치가 없다. 그냥 무말랭이 몇 개 올려서 수육을 먹는 것이다. 보쌈집이라기보다는 수육집이라고 하는 게 더 적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고기와 먹었을 때 맛이 안 어울리진 않는다. 예전에도 이렇게 나왔을까? 보쌈김치라고 적힌 대로 보쌈김치가 나오진 않았을까? 식자재 가격이 올라가다 보니 기존의 보쌈김치를 바꾼 건 아닐까? 계속 곱씹게 된다. 만약에 이 양념이 배추에도 같이 들어가서 진정한 보쌈김치로 거듭났다면, 고기와도 참 잘 어울렸을 텐데.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세호보쌈 만둣국

이 집의 별미는 굴이 들어간 만둣국이다. 굴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굴의 시원함이 국물에 배어들어가서 꽤나 맛있다. 만두 자체도 직접 빚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맛있다.


홍어, 문어는 보쌈과 함께 먹고 싶지 않아서 도전해보진 않았다. 하지만 선택지에 있으니 이 집을 찾았을 때 술과 곁들여서 먹긴 좋을 것 같다.


40년 가까이 전통을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집도 40년 전에는 지금과 같은 모습의 보쌈을 내놓지 않았을 것 같다. 아마도 40년 전에는 더 풍성한 고기와 김치가 있지 않았을까?


여의도가 땅값이 비싸지고, 세상 물가가 올라가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적어도 문 앞에 커다랗게 써놓은 '전통' '보쌈김치' '갈비 삼겹살' 등의 구호는 어느 정도 지켜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에 그 맛과 그 전통, 그 방식을 계속 유지했다면 이 집은 더 훌륭한 보쌈집이 됐을 것 같다. 새삼 을지로와 종로에서 전통을 이어오는 보쌈집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어쨌든 40년 가까이 보쌈만을 취급해 온 곳임에 감사하다. 보쌈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가성비나 김치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을 뿐, 맛도 괜찮은 편이다. 앞으로 더 나빠지지 않고 좋아지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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