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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자선생 Aug 13. 2022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승자의 얼굴’과 ‘홀리 모터스’

서울 중구 다동 YG빌딩 앞에는 황동빛의 가면들이 층층이 쌓여 탑을 이룬 조형물이 있다.

‘승자의 얼굴-공동체 (Winner’s face-community)’라고 이름 붙은, 이철희 작가의 2011년 작품이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개미나 꿀벌 사회에 여왕개미와 여왕벌이 있듯, 인간 사회엔 사회적 성공을 이룬 리더들이 있다…같은 모습의 가면들이 좌우 상하로 붙어있는 가운데, 맨 위에만 홀로 있는 가면이 성공한 사람을 상징한다”고 한다.  

결국 가면들은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얼굴 형태로 표현하지 않고, 하필 왜 가면으로 상징화 시켰을까?


가면은 자신을 감추는 도구이다. 외모를 가리기 위해서 일수도 있고, 표정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속마음을 감추는 용도로 쓰기도 한다. 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인지해 주기를 원하는 컨셉의 가면을 쓰기도 할 것이다.

작가가 사람을 얼굴이 아닌 가면으로 표현한 건,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쓴 채 살아가고 있고, 가면을 잘 활용해야 사회에서 성공확률이 높아진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으리라.

실제로, 인간은 성별, 직책이나 직업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요구받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한 가면을 쓰고 생활한다. 한명의 중년 남성도 남편, 아빠, 아들, 직원, 팀장, 동호회장, 친구 등 다양한 가면들을 동원해서 생활하고 있지 않은가?


이 조형물을 보다보니 예전에 본 프랑스 영화 한편이 생각났다.

‘홀리 모터스’ (Holy Motors)


아침이 되자 성공한 사업가이자 CEO인 오스카는 리무진 뒷자리에 앉아 어디론가 향한다. 운전기사이자 비서인 셀린은 그에게 오늘 9개의 스케쥴이 있다고 알려준다. 잠시 후, 리무진은 도심의 한 거리에 서고 뒷자리에서 내리는 건, CEO 오스카가 아닌, 허리가 90도로 꺾인 늙고 추한 노파이다. 노파는 거리에서 깡통을 들고 구걸을 시작한다. CEO 오스카가 왜 추한 노파가 되어야 하는지…영화를 보던 나는 혼란스러웠다.


영화에서 오스카는 리무진을 내릴 때마다 9명의 전혀 다른 인물로 변장을 하고 있다. 모션캡쳐 전문배우, 기행을 일삼는 광인, 파티장에서 딸을 픽업하는 중년 아빠, 아코디언 연주가, 암살자, 암살자 2, 죽어가는 노인, 옛 애인과 우연히 만난 남자 등.


처음에는 나는 이 영화가 영화계 스타들의 애환을 담은 줄 알았다.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 여러가지 전혀 다른 역할을 맡으면서, 결국 본인의 정체성에도 혼란이 오는 스타들의 삶을 표현한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극중 주인공의 이름도 오스카였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도 아귀가 맞았다.


그런데, 세 장면에서 이 영화는 스타의 삶을 소재로 한 게 아니라, 우리 일반인의 삶을 비유한 거란 걸 알게 되었다. 오스카가 죽어가는 노인역으로 나왔을 때, 노인의 조카가 ‘죽고 난뒤 살아서 걸어나가는’ 오스카에게 자신의 본명을 밝히는 장면. 그 조카도 연기를 한 것이다. 영화 뒷 부분에서 오스카가 마지막 스케쥴로 집으로 들어가는 가장의 역할을 하는데, 그 집은 처음 등장한 그 으리으리한 저택이 아니라 조그만 공동주택이었고, 심지어 아내와 자식은 침팬지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셀린이 리무진 운전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간다고 가족에게 전화하며 가면을 꺼내 쓰는 장면까지.


아~스타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삶에서 여러 개의 가면을 쓰는구나. 전혀 다른 캐릭터를 가진  배역을 맡기도 하는구나. 영화는 인간들이 주어진 사회 역할에서, 또 내면의 다양성으로 인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나”를 여럿 갖고 산다는 점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는 평상시 그렇게 순하고 착하다가도 운전대만 잡으면 카레이서가 되고 야수로 바뀐다는 경우도 들었다. 회사에서는 너그럽고 인자한 상사인데 집에 오면 웃는 얼굴 한번 볼 수 없고 근엄하고 재미없는 아빠들도 많다. 평상시엔 말수도 적고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가도 남자친구만 보면 애교가 철철 넘치는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노랫말도 떠오른다.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좀 난해하기도 하고 정리가 안되는 영화이긴 하지만,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이 영화는 답을 주기 보다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런 거란다. 정리하기 보다 오히려 펼쳐서 관객이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가게 만드는 영화. 아마도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지 않을까.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인가?


20220813

연휴 첫날 센치하게도 나를 돌아보는 놀자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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