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글쓰기는 낯설다
<일방통행로, 사유 이미지> 발터 벤야민, 길, 2007
'일방통행로’에서 역주행한 경험은 운전자 중에는 누구나 경험하는 한 사건이다. 낯선길에서 시간에 쫓기면 우리는 목적지와 가까운 일방통행로로 접근한다. 교통질서 위반, 이와같이 글쓰기와 사유의 위반을 <<일방통행로>>에서 읽고 배울 수 있다. 도로 위 일방통행로를 역주행 하는 마음가짐으로 읽어 보기를 권한다. 그의 사유는 우리의 질서, 사유의 프레임을 걷어낸 지적 사유의 글쓰기, 일방통행로였다. 일방통행로에서의 생명의 아찔함이 아닌 사유의 아찔함. 낮설음과 글쓰기. 의심의 눈길, 예민함의 눈길,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닌 걷고, 사유하고 먹고, 마시고, 대화하고, 때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글쓰기. 일방통행로에는 사유의 발자국, 아사 라치스를 그리워하는 마음, 글쓰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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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과 사유의 쓰기가 생략된 우리
소화물 운송 및 포장 “나는 아침 일찍 마르세유를 지나 역으로 간다. 가는 도중에 내가 잘 알고 있는 장소들, 그리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장소들 혹은 흐릿하게만 기억나는 장소들을 마주치면서 그 도시는 손에 들려 있는 한권의 책이 된다. 나는 재빨리 몇 번인가 더 그 책을 들여다본다. 보관소에서 박스에 포장되어 언제 다시 이 책을 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일방통행로>> P140
벤야민은 파리의 거리인 마르세유를 지난다. 이른 아침, 그가 가는 목적지와 내가 가는 목적지는 목적성을 가진 장소일 것이다. 벤야민은 도시를 거닐며, 관찰하고, 사유하고 쓴다. 이른 아침, 나는 평일이면 가야 할 목적지에 가기 위해 도시를 걷는다. 목적지를 다다르기 전 수많은 직장인, 상점, 사물, 교통수단, 주변의 대화를 보고 듣는다. 새로운 것이나 특이한 것, 필요한 것을 보면 구글링으로 가격, 위치, 간단한 글을 읽는다. 기능적이고 단편적인 사고와 쓰기를 하고 있다. 관찰하고 사유하는 쓰기는 생략 되어 있다.
우리와 달리 벤야민의 지나간 흔적들은 기억되고 쓰기를 통해 이미지적 사유로 재창조 되었다. 도시의 풍경, 사물들이 익숙함을 떠나 낯설음으로 되살려지고 있다.
‘중국산 진품들’에서 읽기와 베껴 쓰기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텍스트를 읽은 사람은 새로운 풍경들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지만, 텍스트를 베껴 쓰는 사람은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일방통행로>> P77
도시와 책 속에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행위는 쓰기이다. 쓰기를 통해 나의 사유는 이전의 나와 달라진다.”말은 생각을 정복하지만 글은 그 생각을 지배한다.“<<일방통행로>> P100. 독창적인 사유를 갖기 위해서는 관찰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쓰기를 통해 사유는 다듬어지고 근육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이미지와 영상, 읽기에 길들여진 눈. 눈은 뇌가 보는 것이다. 뇌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펜을 들고 써야 한다. 쓰면 뇌를 지배하는 것이다. 쓰는 것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사유를 지배한다. 내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익숙함으로서의 거부, 낯설어지게 하는 힘
<<상대성 이론>>은 이번 생에서 이해가 어려워 읽지 못할 것이다. 문학의 상대성 이론에 비유되는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시작은 마르쉘이 마들렌과자를 먹다 과거를 떠올린다.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에 과거가 ‘이미지’로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가 섬광처럼 만나는 ‘순간’이다. 익숙한 것이 낯설어 지는 순간, 벤야민은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온전한 역사는 이미지로 보여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벤야민의 과거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은 역사의 파편들을 주워 담아 거기서 새로운 가치들을 발견하는 넝마주이를 하는 것이다. <<일방 통행로>> 역시 도시의 파편적인 사물, 길거리의 모습, 다양한 공간을 벤야민의 이미지적 사유로 풀어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은 우리 눈에 ‘있는 그대로’ 인식되기 보다는, 머릿속의 프레임(어떤 가치나 지식)에 의해 재해석된 모습으로 인식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건, 사고를 실제와는 다르게, 프레임에 갇혀 사물, 사건 등을 본다. 그의 책 속 글감인 ‘유실물 보관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낯설음이다. ”어떤 마을이나 도시를 처음 볼 때 그 모습이 형언할 수 없고 재현 불가능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 풍경 속에 멂이 가까움과 아주 희한하게 결합하여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P120. 공명을 다른 용어로 지칭하면 울림이다. 멂이 가까움과 부딪쳐 되울려 나오는 현상으로 새로운 풍경(이미지)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순간의 낯설은 풍경(파편)을 벤야민은 글로 표현했다. 그의 글은 몽타주기법으로 작성되기도 했었다. 낯설음에서 ‘다르게 보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기존의 생각을 비틀고 분석도 해 보고 새로운 이미지로 변형도 해 보아야 한다. 나만의 독창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일상의 파편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람과 사물의 매력은 낯설음에서 온다. 익숙함의 거부, 매력 포인트를 발견하는 것은 기존 프레임에 의해 재해석하는 모습을 거부하는 것이다.
벤야민적 글쓰기
지금 수집하고 정리하고 있는 단편적인 글들과 자료들이 언제 작품으로 모아질지 알 수 없고 언제 죽음이 비수처럼 자신에게 찾아올지 모르지만, 작가는 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미완의 원고를 늘 지니고 있는 사람, 사소한 글 재료들과 콘텐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죽음이 자신을 멈추게 할 때까지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벤야민은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작가라고 보는 듯하다. <<철학자의 글쓰기>> 황산, 북바북,P142~143
벤야민은 편집광적인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이 책을 보면 주유소, 우표, 세계 지도 등 일상생활을 하면서 접하는 소재거리로 다양하다. 지나가는 풍경을 파편의 이미지로 환원하여 본인만의 글쓰기로 만들어버린다. 작가의 창작 정신이 돋보인다. 그 창작의 시발점이 사소한 글 재료들과 콘텐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 많은 글 재료들이 sns로 뱉어지고 있다. 글 재료는 몽환적, 지적, 편안함, 선동적이다.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들의 글 재료는 파편적인 한 장면을 설명한다. 사진과 그림처럼 눈에 선명하게 사유하고 쓰기로 전환된다.
계단주의,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엮는 직조의 단계가 그것이다. <<일방통행로>> P93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 세 단계가 소개되어 있다. 철학자의 시선으로 쓴 글이라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음악 – 건축 –직조, 글 재료를 모으기 위해 듣고, 감상하고, 배열, 배치를 한다. 씨줄과 날줄이 엮어져 옷감이 되듯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기 위한 작업은 계단을 오르면서 가지는 목적인식을 가지고, 오르고 난 후 내려오면서 전체를 조망하며 하나 하나의 문장를 퇴고하고 새로운 창작물로 만드는 작업이다. 음악이 흘러 나오는 카페에 앉아 사유하면서 쓰면 좋다. 단, 음악은 “피아노 연습곡 소리나 사람들이 일하면서 지르는 소리들은 유난히 고요한 밤의 정적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P99
글을 쓰기 위한 공간과 시간 확보, 필기구와 노트. 깊은 사유와 노트의 관리 그리고 매일 써라. 글을 써 보고 싶고 글을 쓰는 작가는 벤야민의 13가지 명제를 주의 깊게 볼 이유가 있다. 13가지를 하나씩 보면 그의 작가다운 프로의식을 알 수 있다. 이 중 나에게 해당되는 항목은 전혀없다. 글을 쓰지를 못하는 이유를 13가지 명제(P98~100)에서 알 수가 있었다. 명제 중 “글쓰기를 하루도 거르지 말라.”는 글을 쓰는 사람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항목이다. 3일전 페이스북에서 2명의 글쓰기를 보았다. 그들의 특징은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1인은 전문 작가였고 다른 1인은 에세이스트가 되고 싶은 젊은 주부였다. 두 분 모두 페이스북에 매일 글을 게재하고 있었다. 전문작가 한 분은 수 년째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글은 점점 깊이를 더해 가고 있었고 일상 소재의 글들은 독자의 공감을 쉽게 얻고 있었다. 그에 대해 알아보니 첫 출간한 책이 고전을 읽고 서평한 것이다. 이후 사회비평과 일상적인 글쓰기로 옮겨진 것이다. 깊이있는 글이 써 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분은 에세이스트를 꿈꾸는 젊은 주부였다. 일상 소재를 쉬운 단문으로 구성하여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글쓰기의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읽기 쉬운 글을 쓰기가 어렵다. 그녀의 내공은 매일 글쓰기로 보였다. 그녀의 페이북 글쓰기는 ‘매일 글을 쓰라’는 메세지를 주었다. 쓰다 보면 글쓰기가 늘 것이다. 단, 벤야민의 이말은 새겨야 한다. “어떠한 생각도 자기도 모른 채 흘려보내지 말 것이며, 외국인 등록 일을 담당하는 관청처럼 자신의 노트를 엄격히 관리 할 것.
‘아사 라치스의 거리’, 사유의 발자국
벤야민의 연인, 아사 라치스. 벤야민은 라치스를 바로크 비극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갔던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 만난 라치스를 통해 파시즘의 ‘배경음악 속에서 ”급진적 공산주의의 현재성“에 대한 통찰들을 그녀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한다. 그가 야치스를 만날 때, 그는 자신을 찾아내고,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는 호기심이 가득찬 작가였다. 서로가 바라보는 세계와 지식, 생각을 교류하면서 사유의 폭과 깊이는 나날이 달라지고 있었다. 라치도 또한 그를 통해 <<혁명가의 직업>>을 펴내기도 했다. 지식과 경험에 대한 존중, 나아가 서로에 대한 존경이 두 눈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두 사람 모두 에리히 프롬이 말한 사랑의 행위, 합일의 경험을 하고 있다. 아쉽게도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최고의 관심이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와의 교류에서 얻은 경험이 곳곳에 녹아 있는 <<일방통행로>>의 거리를, ”작자 속에서 이 거리를 뚫은“ 그녀의 이름을 따 ’아샤 라치스 거리‘라고 불렀다. 파리의 지명이 아닌 아사 야치스로 명명했다 그의 ’사유의 발자국‘은 책이 되었다. 지명, 사물, 상점, 관공서, 풍경, 어린아이, 도로 등 아사 라치스의 거리는 글의 소재가 되었다. 그는 이 거리를 걸으며 그녀를 회상하고 그녀의 사유를 복기하며 자신만의 사유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나만의 공간에서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읽기와 듣기 중심의 생활에서 글쓰기가 하고 싶어졌다. 쓰기란 작가의 영역이라 생각했다. 독자는 쓰여진 글을 열심히 잘 읽고 많은 책을 섭렵하면 되는 줄 알았다. 페이스북에 쓰여진 글을 보며 자극을 받았다. 주변(지인, 패북 친구)에 몇 분은 작가로 등단도 하셨다.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쓰고 싶다. 독자는 언젠가는 작가가 된다. 어느 거리를 걸으며 벤야민처럼 사유도 해 보고 싶다. 페북 친구들처럼 일상 속의 이야기도 써 볼려고 한다. 벤야민의 아사 라치스 거리처럼 나만의 공간에서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필기구(PC,노트,펜), 음악, 나만의 글쓰기 장소, 사유를 흘러 보내지 않도록 글을 써야 한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매일. 써 놓고 보니 다 미래형이다. 하지만 지금 쓰는 글은 현재형이다. 현재형으로 계속 남겨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