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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준 Sep 02. 2022

우리의 욕망을 써 내려간다

<<파란방>> 구소은, 소미미디어, 2021


‘파란방’은 파란색과 흰색의 조화를 통해 ‘윤’의 작품세계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형형색색 펼쳐지는 빛의 향연과 달리, ‘윤’의 화실은 파란색과 하얀색의 빛깔로 미술작품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윤’과 3인의 아름다움과 욕망, 결핍과 트라우마를 이야기한다.‘色’의 향연이다. 주인공‘윤’과 3인의 이야기는 ‘性’을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몸에 대한 관심과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랑이란 질문으로 4인의 이야기는 각각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 질문에 대한 자기만의 대답의 방식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사랑, 그놈 참 단어로 한정하기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나 또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 동료들에게 물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모두가 뭘까요 하며 나에게 되묻기만 한다. 도대체 사랑은 무엇일까? <<파란 방>>을 읽으면서, 읽고 난 후도, 오늘도 고민한다.

소설을 보면 여성의 몸, 섹스에 대한 고민, 육체와 정신, 남녀의 오해, 섹스에 대한 단상, 외설과 예술의 사이, 주인공들이 경험한 사랑의 프레임, 고정관념 등이 서술되고 있다. 특히, 여성의 사랑, 욕망,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생각하고 또 책 속에서 어떻게 표현할까? ‘파란 방’은 거침없이 우리의 욕망을 그리고 사랑을 써 내려간다.


1

몸,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고 반응하는 하나의 불꽃이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성적 욕망이다. <<파란방>>에서는 여성의 몸을 이야기한다. ‘여성의 몸은 인간을 만들어내는 물질에 불과하고,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의 주제적 성적 욕망은 지탄의 대상이었다.“인간의 성이 생식만을 위한 것이라면 신은 애초부터 쾌락이니 환락이니 열락을 얼버무려 인간에게 오르가슴을 선사하지 말았어야 했다”거침없이 아리스토텔레스 말을 비판한다. 여성이 몸과 욕망을 알아가기도 전에 사회는 여성의 몸을 특정한 의미로 결정 짓거나 원치 않는 섹슈얼리티를 부여했다. 아름답고 거침없이 묘사한 여성의 몸을, 몸의 욕구를 채우는 주인공의 방식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다.

여성의 몸은 남성이 욕망하고 성적 대상화로 소비하는 여성의 몸이 아닌 여성의 몸을 둘러싼 금기, 강요, 무지를 거부하고 여성의 주체적인 성적 욕망이 드러난다.”아내는 내가 마련해 준 밑트임 팬티만 입은 채 자신의 빈약한 젖가슴을 주무르더니 다리를 벌리고 손으로 자위를 시작했다.(중략)이후 아내는 내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교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주오의 아내는 남편의 강요와 억압으로 인한 가성적인 성적 반응으로 남편의 욕망을 채워주었다. 주오는 아내의 그러한 모습이 ’아내의 성적 만족감이 높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 설치 해둔 CCTV에 비친 아내의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녀는 주오와의 성관계에서 나오는 몸짓이 아닌 아내 스스로 만족하는 몸짓과 교성이었다.“나는 회벽 같은 윤의 등을 노려보며 오르가슴 놀이를 시작했다. 그는 나의 손이 되어 젖가슴을 짓누르고 비틀었으며 젖꼭지를 꼬집었다. (중략) 위태로운 오르가슴 놀이는 전율이 온몸을 간질이며 지나갔다.”윤과의 섹스를 갈망 하지만, 윤의 거부로 인해 성적 욕망을 스스로 채우는 은채, 은채와 친구들의 해외여행에서 20대의 섹스와 딜도로 이야기하는 자위에 대해 거침없이 작가는 뱉어낸다. 소설에서 여성은 자신의 방식으로 섹스를 탐닉하고 욕망을 드러내고 채우고 있다. “여자들의 욕망은 이렇게 반짝이고 있었다. 다만 욕망을 내보이지 않을 것을 강요당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손에 딜도와 바이브레이터를 쥔 여자들은 남자에게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세상은 변화하고 있고 여자들도 달라지고 있다.”. 여성의 몸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이다. 금기시되었던 여성의 욕망을 이 작품 속에서 되살아나 당당하게 여성의 새로운 시선을 입증하고 있다.


2

희경의 사랑과 몸에 태도, 그녀의 메이트 주희를 보며 현대 사회의 성관념과 사랑에 대한 모습을 다양하게 볼 수 있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나 평범하지 못했던 희경. 소설속의 4인의 사랑 중 희경에게 끌렸다. 희경의 사랑은 매혹적이면서 감각적이고, 사랑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낡은 구닥다리로 만들어 버렸다. 20살 상경해 첫 회사에서 송과장의 거짓에 속아, 소위 몸 주고 마음까지 주었지만, 되돌아온 건 남자의 배신이었다. 결국엔 헤어지고 낙태까지 하게 된다. 그날 이후 희경의 사랑은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퇴사 후 희경은 생계를 전전하던 중 양작가(사진작가)를 만나게 된다. 양작가를 통해 희경은 예술가의 오브제가 되는 누드모델을 생활을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예술가들이 찾는 인기 모델이 되었다.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자신감으로, 모델의 경험이 쌓여갈 수록 창작 영감을 예술가에게 불러 일으켰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들과 가볍게 몸을 섞는 사이가 되었다. 같은 누드모델인 주희와도 가까워지고 같이 살게 된다. 주희는 자유연애자이며, 마지막 사랑은 동성연애이다. 그녀는 예술가와 주희를 만나면서 감각적이고 때론 대담하게 몸을 섞는다. 사랑도 가벼워졌다.“사랑은 지나가는 감정이고 상대를 제대로 알려면 섹스까지 해 봐야 된다고 누누이 말해준다 (중략)이런 충고에도 등신처럼 또 사랑을 믿는다. 사랑이라는 달콤한 솜사탕을, 한 줌도 안 되는 설탕을 구름처럼 부풀렸을 뿐인데, 그러니 알지 말고 깨달아야 한다.“ 희경은 주희를 따라 극락게임(난교)도 서슴없이 한다. 극락게임을 묘사한 장면 원초적이고 감각적이다.“작가는 경험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글을 통해 경험하는 사람”으로, 독자 또한 작가의 글을 통해 경험하는 사람이다.


3

희경은 극락게임(난교)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거울방에서 행해지는 극락게임은 평범하고 건강한 육체들이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잠깐의 일탈이다.“ 희경은 극락게임에 초대를 받았다. 극락게임을 하는 거울방에서 이루어지는 목적은 오로지 섹스 그 자체에 만족할 뿐이다. 그 곳에서 눈을 감으면 실체는 사라지고 나를 휘감는 것은 오로지 감각뿐이었다. 그녀는 ’사랑과 섹스의 공통점을 목마름‘이라고 생각했다. 거울방에서 목마름은 가셨지만, 게임 뒤에 찾아든 허무가 낯설었다. 애초에 목적도 없는 섹스였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e est. 포스트 코이툼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에스트.“ 모든 동물은 성교(결합) 후에 우울하다.”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 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놓치고 말았다는 허무함을 느낀다. 그녀는 극락게임 이후에 밀려오는 고독함과 허무, 외롭고 소외된 실존을 고민했다. 희경에게 마음이 간다. 배신감, 감각적 자극, 성교 후의 우울감, 외면, 남녀의 정서적 공감 등 사랑과 성에 대한 태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동생을 위해 영혼까지 파는(은채와의 거래)현실적 모습도 보인다. 소설 속의 다른 이야기보다 희경의 이야기는 젊은이들이 고민하는 사랑과 성의 현실적 모습이다.


4

사랑의 정서 중 하나는 상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주체적인 나의 마음이다. 주체적인 마음이라 자신의 격렬한 감정에 이끌려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소유와 무관하다. 은채는 사랑의 감정을 상품처럼 소유하려고 한다. 윤을 사랑한다고 무조건 윤이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말과 행동은 그를 위해서다. 사랑하기에 나의 호의를 받아들려야 한다. 종국에는 그를 종속 시키는 질투심도 가지게 된다.

질투, 내가 아는 사람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남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것을 부정하는 감정이다. 어찌, 나로 인해서만 상대가 행복해 해야 하는가? 소유하려는 마음으로 인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역설적으로 사랑은 소유하려 하지 않기에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사랑하는 연인은 서로를 위한 시간과 자리를 양보하고 있기에 이미 서로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큰 욕심을 일으켜 통제를 하는 것은 마치 바둑을 둘 때 나의 집에 바둑돌을 두어서 스스로 자신의 집을 허물어 뜨리는 것과 같다. 가지고 싶으면 내 마음껏 가지고, 아니라면 내버려 둘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소유이다. 내버려 둘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내버려 둘 줄 모른다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소유 당한 것이다. 그를 관리하면서 그녀의 생활을 잃어버릴 것이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그의 삶을 맘껏 살게 해주고, 내 삶에 충실한 것이 나의 매력을 증강시킨다. 이러한 자세를 가질 때 나 스스로가 자유롭게 되고, 상대에게 편안함을 선물한다. 상대가 편안하면 나에게 좋은 일이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은채의 쓸쓸한 사랑은 내 인생의 윤이 아니라, 윤 안에 있는 내 인생이었다.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 상대와 함께하는 것이다.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같이 밥을 먹고, 바라보고 웃고,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면 나는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며, 그 이상을 소유할 수 없다. 만약, 윤과 은채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둘의 무대가 각종 시련에도 둘만의 경험이 지속성을 유지하며 영원을 획득해가는 과정이었으면 한다.


5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 똑같이 세상을 볼 수 없고 느낌을 공유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운명과 숙명 중 어디에 해당하는 걸까.”윤은 녹색과 적색 계열의 색을 구분할 수 없는 색맹이다. 그는 색맹이라는 결핍을 숙명으로 안고 태어났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는 모든 것을 잊는다. 그림이 좋아 화가로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결핍, 결핍을 극복하려는 그의 이야기는 아련하다. 등장 인물들의 결핍과 트라우마가 섹스로 묘사된다. 이들의 성행위가 과감할수록 더욱 슬퍼지는 건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다. 그의 결핍된 마음에서 드러난 섹스, 마음 장애, 은채에 대한 모멸감이 윤의 차가운 사랑에서 이야기된다. 윤은 결핍을 예술로 승화했다. 그는 똑같은 밑그림을 2장 그린다. 하나는 은채가 선물한 안경을 쓰고 색을 입힌다. 그런 뒤 안경을 벗고 하나 더 그린다. 사람들은 두 그림을 다르게 보이지만 그에겐 하나이다. 자신의 숙명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니체는 고통을 당하면 그것을 너무 제거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한다. 인간의 실존은 사실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니체의 몸철학은 자기 몸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몸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한다. 자기 몸과 소통하면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며, 욕망을 다스리고 질서를 세울 수 있게 된다. 파란방에서 있었던 사건, 그 후 2년이 지나 윤은 다시 작업실에 나타난다. 주오와 마주친 윤은 달라져 있다. 그는 자신 그대로를 인정했고, 긍정함으로써 삶이 가벼워져 있었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자신의 삶 그 자체를 갖고자 원한 것이 아모르 파티, 운명애라고 이야기 한다. 윤은 마지막에 이 대답으로 ’아모르 파티‘을 갈음한다.“다시 개인전을 할 겁니까?, 네, 그래야지요.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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