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천성적으로 아주 게으른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꿈'을 꾸고 살았다. 재능도 있었고 실제로 잘 하기도 했다. 같은 꿈을 좇던 주변의 어떤 사람들은 천재성을 운운하기도 했다. 가령 A+를 최고 점수라고 칠 때,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대충 A 정도의 결과물은 나왔다. 결과물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든 즐겁게 하든 어찌됐든 시선은 잡아 끌었다. 그래서 나는 손만 뻗으면 꿈을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A+를 받지 못하는 건 내가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꿈을 좇는 내내 게으름 좀 그만 피워. 언제나 자신을 닥달하고 타박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노력이란 걸 해도 결과물은 여전히 A 로 나온다는 점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실제로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뭔가 농락당한 기분?
A와 A+ 를 가르는 결정적 지점, 그 미묘한 지점에서, 누군가에게는 행운이 들러붙었고, 누군가에겐 라인이 보태졌고, 누군가에겐 젊음이 있어 가산점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평생 운 따위에는 기대본 적이 없고 라인도 없고 젊지도 않은 나는, 결과적으로 언제나 A를 받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내 알량한 재능으론 A가 최선인 모양이었다. 천재도 보통 사람도 아닌, 매우 애매한 달란트를 갖고 태어난 비운의 몽상가. 자신의 천상천하 속에서 유아독존하는, 정말로 요령이라고는 1도 없는 무지막지한 고집불통.
살다보니 세상이란 광야를 지나면서 요령은 필수 덕목이란 걸 깨달았다. 요령과 타협을 조금만 부릴 줄 알아도, 아니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만 할 줄 알았어도 인생의 주름은 지금보다 훨씬 얕게 패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요령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우아한 애티튜드를 몸에 장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발길질을 하거나 알콜의 광기를 빌려 지나가는 자동차 뒷바퀴에 발을 걸며 미련한 오기를 기승껏 부리는 일, 잠깐 가슴 속이 뜨거울 때의 이야기다. 이런 것들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가슴 속에 계속 불을 품고 있으면 이 불은 결국 내 속부터 하얗게 태워 나부터 재로 만들어버린다. 그니까 불이 활활 타올라 나를 잡아먹기 전에, 내가 더이상 다치기 전에, 이러한 요령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
하루끼 작품 중에 '하룻밤 사이 머리가 하얗게 새버린 여자'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제목은 모르겠다.
나는 이 작품을 읽었지만 단 한줄, 이 부분만 기억한다. 이보다 우아하게 고통을 형상화하는 말이 있을 수 있을까. 흔히들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머리칼을 하얗게 변색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몸이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 말로 풀면 이렇게나 조야하다. 말로 꺼내는 순간 고통이 퇴색되는 기분. 어떤 종류의 고통(의 기억)은 결코 빛이 바래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쉽게 위로를 건네거나 섣불리 끼어들 수 없는, 오롯이 혼자 받아내야 하는 그런 종류의 고통도 있는 법이니까.
사실 직장과 꿈, 두 가지를 병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꾸만 흰머리 갯수가 늘었다. 남들보다 너무 일찍 많이 자라는 흰머리에 불안함보다는 뭔가 은밀한 즐거움 같은 게 내 안에서 싹을 틔웠다. 내가 틀리지 않았고 제대로 잘 하고 있는 거라고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하루끼 소설 속 여자가 떠올라 오히려 머리카락이 하룻밤만에 다 하얗게 세어버리면 근사하겠는걸, 아침마다 거울을 확인하며 조금 들떴던 기억도 난다. 나는 30대에도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마음도 몸도 항상 바빴다.
그래서 결혼이라든가 하는 류의 이야기는 애초에 의식 저만치 치워버렸다. 하고 싶은 건 거의 다 하면서,
'개 썅 마이웨이'로 젊음을 지나온 나는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인지라, 결혼? 그런 삶은 도무지 견뎌낼 자신이 없어 꿈 속에서조차 내 결혼식 당일 목놓아 펑펑 울었더랬다. 부모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결혼식 좀 제발 취소해달라고 눈물을 쏟아냈다. 내 스스로 생각해봐도 참 질리는 타입. 뭘 그렇게까지? 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타입이 아니라 내 안에서 발견하는 가치를 더욱 의미있게 여기는 타입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걸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내 삶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밤잠을 줄여가며 반복하던 어느날 불현듯,
나는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았다. 간절하게 쉬고 싶었다. 마흔을 앞두고서 였다.
나이 앞자리가 바뀔 땐 나 자신도 뭔가 바뀌어야만 한다. 뭐 이런 강박관념이 있던 건 지도 모른다. 아홉에서 열살이 됐을 땐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될 때나 서른아홉에서 마흔이 됐을 때, 일종의 성장통을 겪듯 몹시 아팠고 그 때마다 변화의 순간들을 겪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 오랫동안 잠을 잤고 잠에서 깬 뒤에는 교통이 매우 불편한 곳으로 이사했다. 이사하면서 처음으로 티브이를 집에 들였다. 그 뒤로 꽤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다.
처음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설핏 미소지었던 것 같다.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되돌아보니 늘 하고 싶은 대로 살았음에도 이상하게 단 1초도 나를 위한 시간은 없던 것 같은 기분. 만성 수면부족과 불면증 사이에서 달리의 시간처럼 내 시간은 통째로 흐물흐물 녹아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살면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들에 관하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치열하지 않은 고민을 했다. 아니 그냥 운을 뗀 정도라고 해두자. 이제와 돌아서기엔 너무 멀리 온 데다가 그만두자니 지금껏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다. 무엇보다도 멈추는 순간 무엇을 하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죄책감 없이 TV를 보며 아무 생각없이 웃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평범하고도 어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정말로 내 자신을 설득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옥죄어 들어오는 뭔가를 해야만한다는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걸까. 나는 대책없는 꿈 꾸는 일중독자였다.
우아優雅하다 -형용사. 고상하고 기품이 있으며 아름답다.
(표준국어대사전)
우아하다는 단어를 국어대사전으로 이해하자니 너무 평면적이다. 이 단어의 육감적인 입체감이라든가 고혹적인 아우라 같은 걸 삶에 덧입히기엔 나의 상상력은 참 조악하다. 그래서 괜스레 우아하고 신비한 동물, 이라고 감히 호언장담하는 고양이라는 동물을 은근슬쩍 내 삶에 끌어들인다. 고냥이 한 놈이랑 툭탁대며 기싸움하고 사는 집사, 라는 멋 없는 타이틀에 고양이의 '우아한' 색채를 더하니 그림이 그나마 조금 볼만해진다. 하지만 아, 여전히 부끄러운 상상력이다.
본래 얘기하고 싶었던 화두를 이제 슬슬 마무리해봐야겠다. 그래서 우아하게 나이든다는 것은 무얼까? 나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탁 리드미컬하게 두드린다. 방점을 찍기 위해 노트북을 두드리며 모니터를 응시한다. 한참이나 썼는데도 여전히 대답은 짙은 안개에 가려 있다. 가만히 안개 속을 응시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더라? 음 안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안개는 한 발 다가서면 한 발 물러나니까. 용기를 내서 성큼 한 발 내딛으면 찰나일지언정 시야가 닿는 곳까진 볼 수 있다. 적어도 발밑 정도는 확인할 수 있고, 평소 관찰력이 좋았다면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되는지 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이 수많은 글자들 사이 사이, 보이지 않지만 틈이 있는 어딘가에, 내가 나 자신도 모르게 숨겨놓은 쉼표와 마침표 사이에서 나의 비밀을 찾아야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아무 소리나 들으려고 우연히 틀어놓은 티브이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에서 "매일 매일 도전하면서 사는 사람은 어느새 상처투성이 도구가 되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한다.
아 그래서 나는 우아하게 나이들기 위한 첫걸음으로 일단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부터 되찾아야겠다고 뜬금없이 마음먹었다. '우아하게 나이들어 가보자' 라는 무조건적 목표 때문에 강제 발굴한 우아함? 너무 딱딱할 것 같고 재미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지극히 사랑스러운 내 안에서 끄집어낸 우아함은 막강 최강이 되어 내가 '개 썅 마이웨이'를 계속 추구할 수 있게 도와줄 거라 믿는다.
3.
일 때문에 쓰는 글 외에 아주아주 오랜만에 글, 비스무리한 걸 써봤다. 너무 오랜만이라 두려운 마음도 있고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몇 번이나 중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기쓰듯 편안하게 끄적여보자 온갖 기운을 끌어모았다. 이제는 나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타이밍이다. 여기에 쓰는 글들은 반쩍반짝거리는 나 자신을 비춰주는 투명한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SNS 활동 같은 걸 거의 하지 않는 나는, (비밀스러운 혹은 음흉한 사람이라~)
정서적으로 너무 미성숙한 나는, (실제 나이보다 적어도 10년은 뒤처진 채 사는 사람이라~)
할 줄 아는 게 글 쓰는 재주밖에 없는 나는, ( 뭘 하려면 늘 동기부여, 명확한 골대가 필요한 사람이라~)
이렇게 우아하게 나이들어가는 일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 브런치에서 다시 한번 꿈을 꿔볼까한다.
우아한 이미지 조각모음1. 안동 월영교 (Photo by Woowaa)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다리.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 한 켤레의 미투리를 지은 아내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다리. 아내의 미투리 모양을 본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 다리를 처음 본 순간, 나는 다리의 고혹적인 우아함에 한 눈에 반했다. 목조 다리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
우아하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상이 은은하게 발산하는 일종의 살아있는 아우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