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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시 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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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도 Sep 10. 2023

타임스퀘어 새벽 네 시

뉴욕 여행 첫날이었다. 짐을 풀자마자 도착한 새벽 네시 타임스퀘어 거리엔 한파로 인한 추위가 가득했다. 요 레이디. 마리화나 냄새가 가득한 골목 사이로 동공이 풀린 사람들이 조각처럼 벽에 기대어 있었다. 이렇게나 거대한 국가 속 거대한 빌딩 사이가 이토록 외롭고 공허하다고. 그동안 다녀온 다양한 국가들 중에서 이렇게까지 내가 자그맣게 느껴지는 곳은 처음이었다. 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날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여기선 내가 날 붙들지 않으면 이 넓은 곳 어딘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소멸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희한하다며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아직 열려있는 가게들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 시간에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유색인종이었다. 길을 걸으며 조심스레 생각했다. 이 나라가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는 키워드를 강하게 내세우는 이유가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타고난 계층이 당장 눈으로 보이는 사회가 아닌가. 그리고 그는 내가 그 시간에 발견한 거의 유일한 백인이었다.


치아가 군데 없고 누추한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어색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있잖아 내가 필라델피아에서 왔는데 내가 지금 돈이 없어서 우리 집에 돌아갈 수가 없어. 가는데 값이 얼마인데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제발 나에게 돈을 주면 안 될까? 내가 집에 돌아갈 수 있게... 제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제발... 몸속에 한 줌도 남지 않은 에너지를 쥐어짜 내는 듯한 가녀리고 불안정한 목소리가 끈질기게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내 정신이 위태로워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있는 돈 없는 돈을 탈탈 털어 온 배낭여행자였기 때문에 한 달러 한 달러가 소중했다. 불경을 외듯 아이엠쏘리를 읊으며 그와 멀어지기 위해 빠르게 걸었다. 그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플리즈를 외치며 끊임없이 내 곁을 쫓아왔다. 저 위에서 시작한 대로변의 중간쯤에 다다라 마침내 길을 걷는 두 건장한 사람을 만났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그들의 뒤에 착 붙어 걸었다. 어느 순간 내 뒤통수에 그의 눈빛이 꽂히고 점점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내일부턴 열두 시 이후로 무조건 자체통금이다. 잘 지키진 못했지만 저 당시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렇게 타임스퀘어 대로변을 따라 이곳저곳을 누비다 다시 센트럴파크 근처 숙소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거리의 홈리스들을 마주하니 다시 그가 떠올랐다. 혹여나 다시 마주칠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걸었는데 한 횡단보도에서 그를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신이시여. 초록불이 켜지고 나는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길 빌었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건너버리자. 그렇게 잰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가는데 맞은편의 그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뾰족뾰족 온 감각을 곤두세운 내 걱정이 무색하게 곁을 지나치던 그는 단 한마디를 던지곤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쏘리 투 디스터브 유.


 이후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니 호스텔이었다. 그의 단호함 또한 놀라웠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들어 놀란 마음이 아까 전 횡단보도에 그대로 멈춰버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방어막을 세울 필요는 없었나. 어차피 그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무엇이 저 사람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생각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개인의 의지박약인가? 사회 시스템의 부작용인가? 나는 저들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삶의 악순환을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침대 위에 누워 얼른 잠을 청해보려 애썼지만 아까의 잔상이 마음속에 남아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 근처에 있던 맥도날드로 들어가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앉아있었다. 매장은 아침 영업을 위해 청소를 하는 직원들로 부산스러웠다. 정신이 분산되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삼불짜리 디카페인 커피가 바닥을 드러낼 무렵 점차 동이 터올랐다. 찬 볕이 서서히 내리쬐는 겨울의 거리 위로 조금씩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밤의 세상이 다 무어냐는 듯 거리가 금세 활기를 띄었다. 밤과 낮의 대조가 너무 분명해서 조금 멀미가 났다. 이게 뭐냐. 미국 여행 첫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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