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조사원 P가 발행한 16개의 기묘한 에피소드
정식으로 발령받은 건 아니지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이동조사원으로 항성계 H 시스템의 세 번째 행성으로 파견되었다. 고향은 궁수자리 알파성 옆 숨은 항성계 A 시스템의 일곱 번째 시한부 행성.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안내서"의 다른 조사원의 권유로 "안내서"의 이동조사원이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행성은 이미 은하계에서 사라졌다. 내가 그 행성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혜성 충돌이 일어날 거란 소식이 들려왔고 정확히 6개월 후 행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돌아갈 곳을 잃은, (하긴 원래 이동조사원은 돌아갈 곳도 시간도 없지만) 나는 은하 중심부를 떠도는 집시 무리와 함께 다니며 "안내서"의 이동조사원 임무를 해왔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은하계에 전설처럼 전해지던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이곳까지 왔다. 은하 중심부에서 70% 정도 떨어진 미개척 항성계에 있는 행성 중 하나가 나의 고향 행성과 무척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얼마나 많은 시공간이 흘러갔을까? 아직 정식 항로도 없는 이곳까지 몇 번의 히치하이킹 끝에 찾아왔다. 정말, 고향 행성과 무척 닮은 곳. 하지만 또 무척 다른 곳. 바로 당신들의 행성 지구이다. 알고 보니 이미 한 명의 이동조사원이 다녀간 곳. 그 조사원의 이야기가 은하계에 전설처럼 전해졌던 것이었다. 그때 그 조사원은 이 행성에 대해 이렇게 보고서를 남겼다.
"대체로 무해함."
그런데,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내 조사 보고서는 조금 다를 것 같다.
"아직은 무해함."
물론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에피소드 1
도서관 2층, 디지털 자료실의 노트북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부팅 버튼을 누른 뒤 잠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부팅이 된다 하더라도 와이파이 신호를 인식하고 접속에 성공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뒷모습. 하필 도서관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몰디브의 시원한 해변 풍경이 바탕화면에 떴지만 아직 마우스 커서가 움직이고 있고 하드디스크 표시등도 깜빡거리고 있었다. 지금 프로그램을 실행시켜봐야 시간만 더 걸릴 게 분명하다.
그때였다. 저게 뭔가? 바탕화면 사진의 오른쪽, 그러니까 해변 숲 부분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는 게 보였다. 그것은 마우스 커서나 먼지가 아니었다. 개미……. 길이 1m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약간 붉은 기운이 도는 녀석이 바탕화면 사진 속의 숲에서 기어 나와 백사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지은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새 도서관의 2층, 게다가 디지털 자료실 안의 개미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다른 동료들이 있지나 않을까 혹시나 싶은 생각에 내 자리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녀석은 누군가(나를 포함한)의 옷이나 가방, 기타 무언가에 붙어 있다가 여기까지 온 게 분명했다.
손가락을 모니터로 향하다가 나는 잠시 망설였다. 왠지 모를 미안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거두었을 수많은 개미들의 목숨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녀석을 구해볼 생각을 했다. 이 한 마리로 인해 나의 수많은 살생의 죄악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녀석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는 셈 아닌가? 알면서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녀석은 이미 백사장을 지나 용감하게도 눈이 부시게 푸른 바다 위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을 구하는 일이 만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녀석은 내가 손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으깨질 만큼 작고 약해 보였다. 손가락으로 집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모니터 쪽으로 살며시 입김을 불었다. 녀석은 납작 몸을 낮추며 바람에 저항했다. 한 번 더 불었다. 이번에도 녀석은 잘 버텼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녀석의 진로 앞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녀석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슬며시 진로를 바꾸어 구름 쪽으로 향했다. 나는 오기가 생겼다. 다시 녀석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새끼손가락이었다. 그러자 녀석은 아예 돌아서버렸다. 기다려! 내가 널 살려 주려고 이러는 거란 말이야.
나는 마침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검지 끝에 침을 약간 묻혔다. 아주 약간……. 그리고 구름 사이를 헤매고 있는 녀석의 등에 살며시 갖다 대었다. 나는 나의 촉감이 초절정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믿으며 최대한 천천히 힘을 주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손끝에, 아니 검지의 피부 표면에, 아니 몇 개의 세포에 녀석의 작고 가냘프고 여윈 몸이 느껴졌다. 재빨리 모니터에서 손을 뗐다. 녀석은 나의 검지 끝에 붙어 있었다. 물론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휴!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이제 저 창 밖으로 녀석을 옮기는 일만 남았다. 그러면 저 푸른 진짜 하늘과 숲이 녀석에게 편안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줄 것이리라.
그런데 순간, 내가 안심하고 있는 그 짧은 순간 녀석이 다시 탈출을 감행했다. 아! 이런, 녀석이 용감하게 나의 검지 끝에서 아래로 몸을 던진 것이다. 나는 얼른 녀석이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키보드.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녀석의 보호색은 노트북 컴퓨터의 검은색 키보드에 완벽히 작용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는 키보드 자판을 오른쪽부터 하나씩 정성스럽게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을 발견했다. 녀석은 키보드의 왼쪽 끝에서 지친 모습으로 쉬고 있었다. esc 키……. 녀석은 용케도 그 esc 키를 알아채고 탈출(escape)을 감행했던 것이다.
순간 나의 입가엔 묘한 웃음이 났다. 그래 그곳이라면 너는 정말 탈출, 아니 도피(escape)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너는 저기 바탕화면 속 몰디브의 아름다운 해변으로 도피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너의 고향을 떠나 여기 나의 노트북 컴퓨터에서 푸른 바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테지. 분명 그럴 거야.
나는 결심했다. 녀석을 보내주기로 했다. 눈을 감았다.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살며시 esc 키를 눌렀다. 최대한 천천히 눌렀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분명 느껴져야 할 녀석의 작고 가냘프고 여윈 몸이 느껴지질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내 손끝과 귀밑머리를 스쳐가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뭔가 짭조름하고 눅눅하고 그러면서도 시원한 바람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다! 그렇다, 그것은 바다였다. 그것도 내 노트북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푸르게 빛나는 몰디브 해변, 그곳이었다. 나는 바로 그 눈부신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나는 그냥 새끼손가락으로 esc 키를 눌렀을 따름이다. 나는 왼손을 쫙 펼쳐 보았다. 새끼손가락 끝에 녀석이 있었다. 그 작고 가냘프고 여윈 몸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