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론』 - 존 롤즈 [서평]
정의론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자유'다. 그리고 자매품으로는 '정의'가 있다. 이 세상에 정말 올바른 정의가 무엇인지 어렸을 적부터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그 해답을 찾아냈지만 왜인지 모르게 존 롤즈라는 인물이 생각하는 '정의'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정의론"이란 것이 왜 그렇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는지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읽게 됐다. 그리고 난 이 선택이 장장 5개월이란 억겁의 세월 동안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할지 당시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이 미련한 짓을 반복할 것 같다. 읽기엔 '지읒' 같았지만 이 저작을 통해 세상에 많은 것들이 영향을 받았기에 나쁘지 않은 책이었다.
책 하나 읽는데 5개월이 걸렸다고? 너가 지능이 딸리거나 문해력이 개박살이 나서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내 대답은 아니다. 쿨병이 돋아 인정하는 척이라도 하고 싶지만 진짜로 아니니까 어쩔 수 없이 내 대답은 아니다. 내가 지능이 딸리는 건 맞다. 그러나 이 책이 병신인 것도 맞다. 우선 역자가 전형적인 교수 번역이다. 난 교수들을 리스펙 하지만 교수 번역은 존중하지 않는다. 존 롤즈가 '애매하다'를 '애매성'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라고 하진 않을 것 아닌가? 굳이 정확한 뜻의 보편적인 어휘를 놔두고 의도적으로 지적으로 보이지도, 전문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현학적인 어휘들의 오용과 남용으로 이 책은 더럽혀져 있다. 마치 방금 문장에서 더럽혀져 있다 대신 점철되어 있다. 라고 하지 않은 것처럼. 굳이 안 써도 될 병신 같은 말을 찾아 쓴다 이 말이다. 그것도 제 때에 쓰지 않고 그냥 마구잡이로. 문맥에라도 맞게 적확히 사용하면 덜 욕을 박았겠지만 말이다. 방금도 정확히 대신 적확히라는 말을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난 문맥에 맞게는 사용했다. 근데 이 역자는 그딴 것도 없다. 심지어 '도덕감'이라는 단어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도 우리말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은 그저 허영뿐인 합성어다.
나를 비웃을 시간에 바로 이 책을 펴서 읽어보면 안다. 이 번역이 얼마나 '지읒' 같은지 지읒을 강조해서 날것으로 쓰고 싶지만 여러 매체에서 내 글을 안 좋게 판단할까 봐 못 쓰겠다. 이 욕을 쓰는 게 무서워서 안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뒀으면 한다. 난 쓰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플랫폼에서 내 글을 거부할까 봐 그런 것뿐이니. 결국 나도 누군가 내 글을 봐주길 바라기에 글을 쓰는 것 아니겠는가? 각설하고. 난 여태 책을 읽어오며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스스로의 조잡한 규칙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 번 펼친 책은 무조건 완독 하시오란 규칙이다. 그 규칙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이미 반절로 쓰레기통에 처박혀있을 것이다. 이제껏 독서를 이어오며 사실 글을 읽는 것엔 꽤나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글도 그냥 닥치고 읽으면 그만인 것 그뿐 아닌가? 란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듯 이 책은 아무리 글을 그림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하고 읽으려 해도 어느 순간 고개를 연신 꾸벅이며 졸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태 어렵게 쌓아 올린 책의 재미도 다 떨어져 나갈 뻔했다. 동시에 삶의 난관도 함께 찾아와 책을 읽는 잉여 시간을 많이 내기 어려웠다. 그래 이건 핑계 맞다. 좀 창피하지 않은가. 한 책을 5개월 동안이나 읽었다는 게. 나도 핑계 좀 대자. 진짜 마지막으로 난 책을 읽으며 모르는 이론이나 주의, 사상, 어휘가 나오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일일이 찾아본다. 100% 지켰다고 할 순 없으나 적어도 70% 이상은 지킨다고 자부한다. 그러기에 속도가 더욱 늦어졌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세계위인전도 아니고 참 유명인들이 많이 나온다. 그게 날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이쯤에서 하품을 하며 하.. 이 새끼는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를 오늘따라 장광설을 늘어놓지? 할 것이다. 이게 바로 앞에서 말한 정의론 역자식 문장이다. 뭐 장광설은 그나마 많이 쓰이는 어휘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나도 이 책을 소화하는데 시팔 5개월이 걸렸는데 억울해서라도 잡설이 긴 것이니 닥치고 감내해라. 그래도 대중의 언어로 유의미한 정보력과 함께 이만한 통찰의 정의론 서평은 당신이 2개 국어가 능통하지 않은 이상 어디서도 읽을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다. 그러니 믿고 끝까지 읽던가 싫으면 지금 꺼져라. 경고다. 내 글은 정해진 놈만 읽게 돼 있고 그렇게 설계했다. 사실 설계하지 않았다.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자 시작한다. 정의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30%의 정의론과 70%의 정의론에 대한 반박, 해명, 변호, 보완론이다. "내가 읽고 난 뒤에 한 줄 요약은 정말 저 문장이 정확하다. 그러나 난 당신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잘 안다. 결국 존 롤즈란 인간이 생각하는 정의는 무엇이고 그가 주장하는 정의론은 도대체 무엇이냐 이거 아니겠는가? 후자는 본론에서 알려주겠고 전자는 사회의 규칙을 정할 때 내가 어떤 처지에 놓일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합의한 규칙이 정의롭다는 것이다. 생뚱맞지만 늦은 오후부터 글을 썼더니 밤이 깊어졌다. 난 일찍 자야 한다. 내일 이어서 서평을 마무리 짓겠다.
아침이 밝았다. 마피아 게임이 아니다. 정신이 맑다. 가보자. 먼저 존 롤즈와 정의론이 왜 이렇게 권위적이고 유명한 지부터. 존 롤즈의 정의론은 당대 사회 복지의 극대화만 주야장천 외치던 공리무새들 사이에서 당당히 '아니오'를 외칠 뿐만 아니라 정의론이란 혁신적인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모든 학자들은 이 이론에 대해 물고 뜯고 씹고 늘어지고 아주 지랄하고 자빠졌다. 쉽게 말해 최대 행복을 외치던 시대에 존 롤즈는 그 행복이 공정한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정치철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정의론』이다.
존 롤즈는 미국 볼티모어 태생으로 2002년에 죽었으며 프린스턴, 코넬, 메사추세츠 공대(MIT)를 거쳐 하버드 대학 철학과 교수와 명예교수를 지냈다. 주요 저작으로는 3대 명저로 꼽히는 이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 만민법이 있으며 외에도 근대도덕철학사 강의, 공정으로서의 정의 등이 있다. 그는 단일 주제의 철학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평생 '정의'라는 한 우물만 팠던 철학자이자, 정의 순애보이다.
저자 소개는 이쯤 마치고, 줄거리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도대체 존 롤즈가 제시한 정의론의 뼈대 이론은 무엇인지 먼저 짚어 주겠다.
제1원칙
각자는 모든 사람의 유사한 자유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전체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제2원칙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가지, 즉
(a) 그것이 정의로운 저축 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이득이 되고,
(b) 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가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
제1우선성 규칙(자유의 우선성)
정의의 원칙들은 축차적 서열로 이루어져야 하고 따라서 기본적 자유는 자유를 위해서만 제한될 수 있다.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a) 덜 광범위한 자유는 모든 이가 공유하는 자유의 전 체계를 강화해야만 하고,
(b) 덜 평등한 자유는 보다 작은 자유를 가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제2우선성 규칙(효율성과 복지에 대한 정의의 우선성)
정의의 제2원칙은 서열상으로 효율성의 원칙이나 이득의 총량의 극대화 원칙에 우선해야 하며 공정한 기회는 차등의 원칙에 우선해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즉
(a) 기회의 불균등은 보다 적은 기회를 가진 사람들의 기회를 증대해야만 하고,
(b) 과도한 저축률은 결국 이러한 노고를 치르는 사람들의 부담을 경감시켜야만 한다.
이제 책의 줄거리를 쉽게 요약해 주겠다. 위에 핵심 이론들을 용어 정의부터 시작해서 저런 규칙을 세우면 합리적인 인간은 이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과정을 풀어서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 당대 학자들이 얼마나 힐난했으면 과장 살짝 보태 이 책의 80%가 반박과 해명이다. 어쩌면 이 책의 이름은 "정의론"이 아닌 "변호론"이 되어야 할 것처럼 말이다. 이게 전부다. 줄거리가 빈약하다 느끼는가? 근데 정말 저것이 줄거리다.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가 줄거리인데 저게 이 책의 핵심이란 말이다. 그러나 걱정 마라. 앞으로 내가 책의 내용을 인용하며 나의 생각들을 같이 나열할 때 이 책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올 것이다.
이제부터 아주 딥해질 것인데 그전에 역자를 조금 까야겠다. 앞에 잠깐 언급한 걸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 좋은 통찰이 있는지 여부와 책을 추천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히 하고 가겠다. 우선 역자 까는 것부터. 서울대 철학과 황경식 교수다. 난 옮긴이의 말이나 역자의 해설 따위를 아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인데 이 책의 옮긴이의 글은 정말 문장이 수려하게 잘 쓰였다. 책에 따로 메모해 놨을 정도로 글을 맛깔나게 잘 썼고 날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나 보다. 아니 그 기대를 떠나서도 본문에서의 번역은 정말 졸작이다. 본인의 권위에 너무 취해 있는지 온갖 불필요한 현학적 어휘와 매끄럽지 않은 번역이 끝까지 개판을 친다. 간혹 저자의 뜻을 독자들에게 온건히 전달하겠다란 간사하고 근사한 핑계로 서로 다른 언어의 깊이를 배제하고 단순하게 우리의 언어로만 단편적으로 번역하는 아주 게으르고 실력은 형편없는 역자들이 있는데 이 역자가 딱 그 격이다. 아주 게으르고 형편없는 번역이며 최악의 번역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본인의 전문성을 돋보이고 싶은 것인지 자기 딴엔 근사한 학자의 언어처럼 문장을 만들었겠지만 내가 볼 때 이것이 정녕 '한국어'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쓰레기보다도 못한 더러운 악취가 가득한 문장들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그냥 읽어보면 안다.
까는 건 이쯤 마무리하고 이 책은 내 기준에 찬란한 통찰이나 지혜 따윈 없다. 그리고 추천하지도 않는다. 혈압 오르기 때문에. 그러나 읽어볼 만한 책이란 것엔 이견이 없다. 다른 역자의 버전으로 읽거나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정의론이란 책을 통해 얼마나 많은 정치 철학의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졌는지 얼마나 많은 학자들과 인물들이 영향을 받았는지 이 책을 알아야 더욱 폭넓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니깐 말이다.
이제 내 서평의 매력덩어리 인용과 함께 내 생각 펼치기에 온 걸 환영한다. 여기서부터는 진짜 호불호가 심히 갈릴 테니 이만 가도 좋다. 할 일 하러 가라. 진심이다. 이 책을 읽으며 유독 인용할 부분들이 많아 다 읽고 나니 상당수의 페이지가 접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인용과 더불어 나의 생각들을 다 꺼낸 이후엔 말미에 정의론에 대한 나의 결론을 띄워 보겠다.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 - 존 롤즈, 「제1장 공정으로서의 정의」, 『정의론』, 이학사(2003), 36쪽.
이 부분은 존 롤즈가 공리주의를 까는 것이다. 공리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 것은 맞으나 까는 것엔 이견이 없다. 허점이 많은 이론이다.
"사람들이 서로 차별 대우를 함으로써, 자신의 자존심을 고양시키는 수단으로 타인들의 자유를 감소시킴으로써 어떤 쾌락을 얻는다면"
"자유를 구속당하는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즐거워하는 개인은 자신이 이러한 즐거움을 요구할 아무런 권리도 없음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손실에 대해 갖는 쾌락은 그 자체가 부당한 것이며" - 존 롤즈, 「제1장 공정으로서의 정의」, 『정의론』, 이학사(2003), 69쪽.
"천부적으로 혜택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재능을 더 많이 타고났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는 이득을 볼 수 없으며 훈련과 교육비를 감당해야 하고 불운한 사람들도 도울 수 있도록 그들의 자질을 사용해야 한다. 아무도 자신의 보다 큰 천부적 능력이나 공적을 사회에 있어서 보다 유리한 출발 지점으로 이용할 자격은 없다. 하지만 물론 이것이 이러한 차이점들을 무시하거나 없애야 할 이유는 아니다. 그 대신 기본 구조는 이러한 우연성이 최소 수혜자의 선을 위해서 작용할 수 있도록 편성될 수 있다." - 존 롤즈, 「제2장 정의의 원칙」, 『정의론』, 이학사(2003), 217쪽.
"지식이 없다는 것이 그릇된 지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 존 롤즈, 「제3장 원초적 입장」, 『정의론』, 이학사(2003), 217쪽.
"예를 들어 유리한 지위에 있는 어떤 사람은 바람직한 자질과 능력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정도로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충분히 명백한 것이다." - 존 롤즈, 「제5장 분배의 몫」, 『정의론』, 이학사(2003), 414쪽.
"대표적인 입법자들마저도 지식과 추리력에 있어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 중의 누구도 타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알지 못하며" - 존 롤즈, 「제6장 의무와 책무」, 『정의론』, 이학사(2003), 468-469쪽.
모두 같은 맥락으로 인용을 가져왔다. 이전에 내가 진정한 부자를 구분하는 법과 관련하여 글을 끄적인 것이 있는데 오늘 그 이야기를 간략히 해보겠다. 인간은 비교와 차별, 경쟁을 좋아한다. 안 좋아한단 사람의 말은 믿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감정이 생기더라도 그 감정을 야릇하게 즐기느냐 아니면 선을 지키고 끊어내냐의 차이다. 난 후자로 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떤 부자들은 자신의 인내력, 노력을 찬탄하며 타인을 무시한다. 당연하게도 겉으로 대놓고 표출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의 사소한 행동거지와 표정들, 미묘한 어조, 말씨에 묻어 나온다. 설사 완벽하게 교묘히 숨겼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난 그러한 부류를 부자로 또는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도 전에 건강이 악화됐다면? 길 가다 차에 치였다면? 문명조차 사치인 외지 무인도 한 부족의 아이로 태어났다면? 사실상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운이다. 자신의 노력이라 칭송하는 것들도 남들 또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모두가 사실 각자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은 내심 자신이었기에, 그만큼 피를 흘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자신을 과신하고 의지하고 성공했다 생각한다. 난 전혀 아니라고 본다. 물론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재능도 있어야 노력도 그 재미가 생김에 따라 같이 붙는 것이다. 노력으로 재능을 뒷받침한다는 말은 애초에 잘못됐다. 어느 정도의 재능이 따라줄 때 의지가 샘솟고 열정이 생겨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성공의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고.
요즘 자청을 선두로 진화심리학, 러닝, 책 읽기, 글쓰기가 대한민국에서 성행하고 있다. 이러한 시류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런 것을 즐겨하며 저런 활동을 하지 않는 이들을 내심 자신보다 낮게 여기는 오만하고 우매하며 목이 곧은 멍청이들이 많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이 책의 문장처럼 지식이 없다는 것이 그릇된 지식은 아니며 그들이 현명하지 못하다란 방증도 아니다. 난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수준 낮은 이들은 이 글을 보고 좌빨, 진보를 들먹이거나 타인의 성공을 시기해서 남의 노력을 운으로 치환시켜 자위하고 싶은 불쌍한 인간의 푸념 따위로 볼 줄을 안다. 그런 구더기만도 못한 지능을 가진 이들. 그들은 자신이 잘났고 지능이 높다 생각하지만 내가 볼 때 그 누구보다 지능이 현저히 떨어지며 그런 이들과 시간을 보낼 정도로 나 또한 한가하지 않다.
난 그저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자신이 좋은 환경에 있다면 엄청난 운이 따라준 것이며 감사해야 함을 말이다. 그 누구도 타인을 우습게 여길 수는 없는 법이다. 위의 문장들에서 존 롤즈 또한 그런 것들을 예민하게 느끼고 그러한 감정들을 즐기는 것을 꺼려한 인간인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안경잽이 같은 놈들 말고.
"유사한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유사한 인생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분명하게 말하면, 천부적 자산을 분배할 수 있다고 가정할 경우 동일한 수준의 재능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서 그것을 사용할 동일한 의향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 체제 내에서의 그들의 최초의 지위에 관계없이 동일한 성공의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존 롤즈, 「제2장 정의의 원칙」, 『정의론』, 이학사(2003), 120쪽.
"분명한 해결책은 어떤 한 사람이 케이크를 자르고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먼저 케이크를 집어 가게 한 후 그는 가장 나중의 조각을 갖는 것이다. 이 경우에 그는 케이크를 똑같이 자를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신에게도 가능한 최대의 몫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 존 롤즈, 「제3장 원초적 입장」, 『정의론』, 이학사(2003), 135쪽.
"불평등이 가장 불운한 사람에게 이득이 되고 자유 및 기회 균등과 양립할 수 있는 경우에 허용될 수가 있다. - 존 롤즈, 「제5장 분배의 몫」, 『정의론』, 이학사(2003), 372쪽.
이번엔 롤즈가 생각하는 정의란 주제로 인용들을 가져왔다. 위 인용 중 케이크 예시가 인상적인데 모두가 배고픈 상태에서 어떤 한 사람이 케이크를 자르고 그는 가장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먹어야만 한다면 그는 모두 동일한 사이즈로 자를 것이다. 이게 곧 존 롤스가 생각하는 정의다. 결국 정의론은 어떠한 불균형이 발생했을 때 그 불균형이 최약자에게 유리하게 형성되어 있다면 그게 옳은 방향이라는 것이다. 난 이 기준이 꽤 괜찮다고 본다. 그러나 내 핵심 철학은 모든 인간에겐 각자만의 주어진 운과 운명, 삶들이 있고 각 역할과 기능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개중 일부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개똥철학이다.
"우리의 자존감은 보통 타인들의 존경에 달려 있으며, 우리의 노력이 타인들에 의해 존중됨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의 목적이 실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견지하기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렵게 된다." - 존 롤즈, 「제3장 원초적 입장」, 『정의론』, 이학사(2003), 247쪽.
"당사자들이 상대방의 이해에 무관심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사회 속에서 자신들이 그들 동료들의 평가에 의해 확인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목적 체계가 갖는 가치에 대한 그들의 자존감이나 확신만으로는 타인들의 무관심뿐만 아니라 경멸을 견뎌 낼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상호 존중의 의무가 지켜지는 사회에서 생활함으로써 혜택을 받게 된다." - 존 롤즈, 「제6장 의무와 책무」, 『정의론』, 이학사(2003), 443쪽.
이 인용들의 키워드는 '쿨병'이다. SNS 만연해 있는 정신 쇠약자들을 하이에나처럼 노리는 자기계발러 또는 자칭 마인드셋 강사, 심리학 ㅈ문가들이 판을 치는데 그런 이들은 하나같이 자존감이 중요하다고 한다. 나 자신을 사랑해야 남들도 날 사랑해 주고 존중한다고 그리고 타인의 기대나 시선을 개의치 말아야 한다고. 본인들처럼 남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살라고 알량한 언사를 무책임하게 뇌까린다. 난 저런 뱀의 혀를 가진 자들이 정말 세기의 히틀러이자 짐승이자 '쿨병'말기라고 본다.
위의 인용들처럼 인간은 자고로 타인을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게 인간이다. 요즘 '본질'이란 말도 어지간히 사람들이 좋아하던데 그래 그게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타인을 의식하고 신경 쓰며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 것.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대단한 정신력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도 타인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결국 그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난 그게 바로 자신을 지옥으로 가장 빠르게 보내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악하며 그중 가장 악한 것이 바로 자신이다. 그런 자신의 진면목을 빨리 깨달을수록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본다. 난 나의 악함과 간사함과 더러운 욕망만이 들끓는 인간임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자각하며 살아간다. 그러기에 세상을 더욱 또렷하게 볼 수 있다. 난 나를 의지하지 않고 나를 믿지 않으며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래 난 기독교를 믿는 기독교인이다. 어떤 하류들은 얼마나 나약하면 신에게 의지하냐고 하던데 그 말을 죽음 앞에서까지도 기백을 유지하길 바란다. 그네들의 말대로 난 나약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내가 부족한 것을 처참히 깨닫고 살아가기에 더 열심히 산다. 누구보다 핑계 대지 않으며 내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나아간다. 맹세코 난 이 방향이 맞다고 생각하며 신념에 흐트러짐이 없다. 못 배운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정말 무섭다고 하던데. 그런 말에 가스라이팅 당해 신념을 가지지 않는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된다. 그런 그럴싸한 말들에 정함이 없는 자들은 어차피 어떤 말을 해도 이리저리 휘청인다. 말이 길어졌다. 결국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이들과 나는 어울릴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과 어울릴지는 내 알빠가 아니다. 당신이 선택해라.
"우리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에서 오는 자아의 위축을 느끼게 된다." - 존 롤즈, 「제7장 합리성으로의 선」, 『정의론』, 이학사(2003), 575-576쪽.
존 롤즈는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살지 못하는 이들의 슬픔과 약자들의 아픔을 깊이 사색한 철학자였던 것 같다. 우리는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상이 못 이루어진다 한들 나는 그 이상을 무덤까지 이고 갔으면 한다. 그 믿음이 삶을 바꿔주니까 말이다. 결국 인생은 정확한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확신의 싸움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방향이 맞는지는 최후의 순간에 알 수 있다. 그 방향이 정확한지 우리는 전체 인생을 소진하며 찾아내야만 한다. 방향만 옳다면 속도가 아무리 느리더라도 그 누구보다 먼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해 있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난 그 방향에 확신이 있는 한 사람이다.
"나는 이같이 복잡한 문제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겠다.", "이에 대한 언급은 나중으로 미루겠다.", 타당한 논거가 있는가에 대해 더 이상 검토하지는 않겠다." - 존 롤즈, 「제5장 분배의 몫」, 『정의론』, 이학사(2003), 399쪽.
내가 말한 정의론이 왜 변호론이 되어야 하는지 아주 극히 일부분을 가져왔다. 이게 모두 한 페이지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게 믿기는가? 존 롤즈는 이 책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호, 보완, 반박, 해명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집요한 척하나 집요하지 않으며 완벽한 척하나 완벽하지 않다. 회피도 많이 한다. 그래서 당시 학자들도 더 신랄하게 흥이 올라 까댔나 보다.
"특정한 경우에는 우리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하도록 요구받기는 하나 정상적인 여건 아래엣서 좀 더 장기적으로 볼 때 그 일은 결국 우리에게 이익이 될 가능성이 있다." - 존 롤즈, 「제6장 의무와 책무」, 『정의론』, 이학사(2003), 444쪽.
위의 말처럼 우리네 인생을 뒤돌아 보면 결국 하기 싫었지만 억지로 했던 일들도 결국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도움 될 때가 참 많다. 그 점이 공감되어 가볍게 인용하고 넘어간다. 보통은 이렇게 책을 읽으며 인용하고 싶었던 문장들을 모두 가져오지 않고 몇몇만 선별하나 이 서평은 왜인지 모르게 나중에 내가 다시 찾아 읽을 때 하나도 빠짐없이 이때의 감정들을 오롯이 기억하고 싶어 이번엔 예외 하나 없이 모두 인용하며 이것들에 관한 모든 생각을 너저분하게 다 펼쳐놓고 마무리 지을 것이다.
"시민 불복종은 또 다른 이유에서도 비폭력적이다. 시민 불복종은 그것이 비록 법의 바깥 경계선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법에 대한 충실성의 한계 내에서 법에 대한 불복종을 나타내고 있다. 그 법을 어기긴 하지만 법에 대한 충실성은 그 행위의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인 성격과 그 행위의 법적인 결과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에 의해 표현된다. 이와 같은 법에의 충실은 다수자로 하여금 그 행위가 사실상 정치적으로도 양심적이고 진지하며 또한 공중의 정의감에 호소하려고 의도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 완전히 공개적이고 비폭력적인 것은 우리의 성실성을 보증하기 위한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의 행위가 양심적이라는 것을 다른 이에게 확신시키거나 심지어 우리 자신 앞에서조차도 이것을 확신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다수자(혹은 효과적인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정의감에 호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정의감이 그릇된 것이거나 혹은 효력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호전가는 형벌을 피하도록 힘쓰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는 법을 위반한 데 대한 법적인 결과들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그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 권력의 손길에 농락당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반대하는 체제의 합법성에 대한 인정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 존 롤즈, 「제6장 의무와 책무」, 『정의론』, 이학사(2003), 478-479쪽.
위 인용들은 부정의한 법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서 3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부정의한 법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으니 지키는 일반 시민의 유형과 부정의한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기되 처벌을 감수하고 공개적이며 비폭력적 방식으로 저항하는 유형을 시민 불복종이라 칭하고 그런 법 자체를 애초에 인정하지 않고 처벌을 회피하며 폭력까지 선택적으로 일삼을 수 있는 급진적인 유형을 '호전가'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존 롤즈의 입장은 사회는 공정한 협력 체계이므로 기본적으로 법의 울타리 안에 있되, 심각한 부정의는 시민 불복종의 방식으로 책임과 손실을 감수하며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나도 원류는 비슷하나 입장이 다르다. 애초에 법이란 감옥은 인간들이 스스로 옭아 맨 감옥이므로 심각한 부정의일 경우 호전가의 방식으로라도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당연히 인간에게 법이 없으며 무질서가 초래되고 치안이 위험하며 모두가 어떠한 것을 지키고 이것을 어겼을 때 처벌을 받는다는 동일한 믿음이 없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그런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정말 부정의하고 파렴치하며 부도덕한 법일 경우 언제라도 호전가가 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의 나의 지론이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너가 만약 이것들을 지키면 내가 ~를 해주겠다. 라고 하지 개판치고 동성 연애하고 우상을 섬기는데도 이미 한 약속이니 무조건적으로 지키겠다 하지는 않는다. 난 이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그 누구든 호전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그나마 사회의 균형이 유지된다고 본다. 만약 그런 가능성마저 사라진다면 이 세상엔 제 2 제 3 제 4의 히틀러들로 넘실댈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다양한 관심과 권력, 특전, 부 등에 대한 욕구들이다." - 존 롤즈, 「제6장 의무와 책무」, 『정의론』, 이학사(2003), 501쪽.
"인간 존재란 어떤 것에 더 유능해질수록 그것을 하는 데 즐거움을 갖게 되며, 똑같이 잘할 수 있는 두 가지 활동 중에서는 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분별력을 더 많이 보여주는 종목을 택한다는 점이다.", 즐거움이나 쾌락이란 반드시 건강하거나 정상 상태를 회복하거나 결함을 보완하는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자신의 능력을 행사할 경우에 여러 종류의 쾌라고가 즐거움이 생겨난다." - 존 롤즈, 「제7장 합리성으로의 선」, 『정의론』, 이학사(2003), 551쪽.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알기를 욕구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연적인 발전에 의하여, 그리고 사실상 그 원칙이 타당하다면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 어떤 종류든지 좀 더 복잡하고 힘이 드는 활동에 가담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하여 우리는 그러한 욕구를 습득해온 것 같다. 인간들은 보다 큰 다양성을 갖는 경험을 즐기며 그들은 그러한 활동이 제공하는 새로움, 경이 그리고 창의와 발명의 기회에 즐거움을 갖는다. 자발적인 활동의 대다수는 우리가 상상력이나 창조적인 환상에서 취하는 즐거움의 표현이다." - 존 롤즈, 「제7장 합리성으로의 선」, 『정의론』, 이학사(2003), 557쪽.
"어떤 활동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원칙을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그것은 무기력하고 단조로운 것으로 보일 것이며 유능하다는 기분이나 그것이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타인들이 인정하고 즐거워하는 정도에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이 우리의 동료에게 평가받지 않는 한 우리가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타인들도 우리가 하는 일이 그들의 존경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우에만 그것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잡하고 미묘한 재능을 보여주고 분별력과 세련미를 나타내는 활동은 행위자 자신이나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 의해서 귀중하게 여겨진다.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실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경험하면 할수록 그는 우리의 재능도 더욱더 귀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 존 롤즈, 「제7장 합리성으로의 선」, 『정의론』, 이학사(2003), 569쪽.
위 인용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욕구는 무엇이고 어떤 것에 영향을 받으며 무엇을 즐거워하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요즘 '자아실현'이란 모호한 어휘를 써서 어두운 이면을 가리는 졸렬한 수를 쓰곤 하는데 결국 인간은 권력, 부, 특전에 대한 욕구가 근원적이라는데 심히 공감하는 바다. 또한 어떤 일을 하며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선호하고 타인의 인정까지 더해지면 그것은 그의 천직이 된다. 예술이 점점 기괴한 걸 추구하거나 남들과 다른 것들을 시도하려고 지랄 똥을 싸고 깝죽거리다 실제 변기까지 내놓는 것도 다 이러한 맥락과 결을 같이 한다. 직업의 귀천은 없으나 선호하는 직업이 있는 경우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는 타인이 추켜 세우는 직업을 알게 모르게 더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물론 마음가짐에 따라 일하는 것은 자유지만.
"지금까지 나는 선the good이라는 개념에 관해서 별로 이야기한 것이 없다.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의 선이란 어느 정도 유리한 여건 아래서 그에게 가장 합리적인 인생 계획이 무엇인가에 의해 정해진다고 했을 때 그것을 간략히 언급했을 뿐이다." - 존 롤즈, 「제7장 합리성으로의 선」, 『정의론』, 이학사(2003), 512쪽.
존 롤스는 선(the good)을 일반 도덕적인 의미의 선으로 정의하지 않고 이 책에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린다. 그것은 바로 합리적 인생 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이다. 이 말이 참 모호하다. 풀어 말하면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들과 순간이 적절히 제공된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얻는 성취와 즐거움을 통해 자기 만족감과 자존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복잡하게 정의했냐 물으면 무엇이 올바른 정의인지 사회 규칙을 세우기 전에 개개인마다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비로소 올바른 정의를 세울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내가 생각할 때 인간의 최대 행복은 '자유'에서 온다. 사후세계든, 죽음이든, 이 현생이든, 대인관계든, 돈이든, 명예든 모든 것에 적용된다. 난 그래서 그 자유를 갈망하며 나아간다. 어느 것에도 옭아 매여 있고 싶지 않다. 그런 비굴한 삶은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다. 오늘 뒤지더라도 어떤 것에도 휘둘리고 싶지 않다. 난 최후의 자유를 갈망한다. 이것은 요즘 흔히들 말하는 경제적 자유란 천박한 언어로 합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력감과 관련된 우리 자신의 가치에 대한 자신감의 결핍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우리의 생활 방식은 무미건조하며 또한 우리가 그것을 변화시키기에는 무력하고 아직도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행하기 위한 수단을 확보할 힘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인생 계획의 가치와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는 사람은 증오심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자신의 행운에 지나친 집착을 하지도 않는다. 또한 비록 그렇게 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는 스스로 손해를 보면서까지 타인들의 이득을 깎아내리려는 욕심을 갖지 않는다." - 존 롤즈, 「제9장 정의는 선인가」, 『정의론』, 이학사(2003), 684쪽.
존 롤즈는 자존감을 최고의 가치로 뽑는다. 자존감이 없으면 의욕 자체가 사라지고 무력감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증오심에도 휩싸이지 않는다란 궤변까지 늘어놓기 시작한다. 제대로 된 일반화의 정확한 예다. 이는 당연히 개소리다.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는 이들은 최악의 골칫덩어리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다름없다. 난 자신을 믿지 않는 이들을 더 신뢰한다. 자신을 믿지 않기에 더욱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을 좋아하며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배움의 자세에 임하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난 자신을 과신하는 건방진 애새끼들을 거른다. 절대 팀플레이어로 두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사람을 고르는 철칙이다. 이런 면에서 존 롤즈는 아직 애송이며 편협한 시야에 갇혀 세상을 재단하고 일반화한 것이다. 운전을 할 때도 나 10년 무사고야 라고 지껄이는 인간보다 운전은 누구든 항상 조심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100배 낫다. 10년 무사고라 자신만만해하는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인 것이다.
"많은 보수적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의 사회 운동에 있어서 평등에로의 경향은 시기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 존 롤즈, 「제9장 정의는 선인가」, 『정의론』, 이학사(2003), 688쪽.
이것 또한 잘못된 판단이다. 사실은 그들이 평등을 원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 잘못된 방식으로 쉽게 부를 꾀하거나 실제로 부를 차지하는 이들의 간계를 어떻게 저지할 줄 몰라 생각 없이 표현하다 보니 평등이라는 단어로 사람들이 몰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합리적인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고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리라는 합당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동안 행복하다." - 존 롤즈, 「제9장 정의는 선인가」, 『정의론』, 이학사(2003), 703쪽.
존 롤스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다. 난 아까 말했듯 행복은 모든 것에서의 '자유'에 있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좋은 사람은 필요한 경우 그의 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버리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는 장기간의 미지근한 즐거움보다 단기적인 강렬한 쾌락을, 많은 햇수동안 빈둥거리며 사는 것보다 열두 달 동안의 고귀한 삶을 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존 롤즈, 「제9장 정의는 선인가」, 『정의론』, 이학사(2003), 712쪽.
여기에서 좋은 인간은 자신의 친구를 위해 목숨도 버린다고 하지만 그것은 곧 그렇게 하는 선택이 자신에게 더욱 값어치가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서다. 해당 인용도 그러한 결로 문장을 이어 나갔다. 꽤나 마음에 드는 표현들이다. 곧 자신에게 그것이 더 좋은 선택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일 뿐 선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악하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득이기에.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타적인 인간은 없다. 성경에 보면 "사람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란 구절이 있다. 난 이 구절을 아주 사랑한다. 인간의 모든 계획엔 '선'이 없다.
"만일 우리가 마음의 순수성을 지닐 수만 있다면 분명한 이해를 갖고서 그와 같은 관점에서 오는 도덕감과 자제력으로 행위하게 될 것이다." - 존 롤즈, 「제9장 정의는 선인가」, 『정의론』, 이학사(2003), 750쪽.
이 책의 가장 마지막 문장이자 존 롤즈의 애처로운 푸념이 느껴지는 글이다. 존 롤즈, 당신이 그토록 정교하게 제시한 이 기준들이 올바르게 지켜고 사회에 합의된다면 과연 인간은 정의로워질까? 내 대답은 이미 알겠지만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다. 씨앗이 햇볕을 향해 고개를 들듯 인간 또한 부정의한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좇고 그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며 그 발은 항상 피를 흘리는 데 빠를 뿐이다.
그럼 이 정의론은 모두 헛수고인 것일까? 그 또한 아니다. 이 책이 인류에게 필요한 이유는 이러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인지함으로써 그 기준이 이뤄질 순 없지만 양질의 기준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류의 안목과 통찰을 좋은 방향으로 제시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조금씩 변화하게 한다.
난 그것이 바로 이 정의론의 순기능이라고 본다. R.I.P. 존 롤즈여.
제목 : 정의론
저자 : 존 롤즈
출판 : 이학사(030315)
번역 : 황경식
내용 : 존 롤즈가 생각하는 정의의 세계관 번역만 괜찮았다면 더욱더 명저가 되었을 법한 책.
목차
옮긴이의 말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제1부 원리론
제1장 공정으로서의 정의
제2장 정의의 원칙
제3장 원초적 입장
제2부 제도론
제4장 평등한 자유
제5장 분배의 몫
제6장 의무와 책무
제3부 목적론
제7장 합리성으로서의 선
제8장 정의감
제9장 정의는 선인가
옮긴이 부록
세기의 정의론자 존 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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