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있었다. 졸리기도하고 감기기운 때문에 운동을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저번주에 봤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의 일부분이 떠올랐다. '외로움이란 분리되기 두려워하는 욕망에서 시작되는 것' 이라는 뉘앙스의 문장 말이다. 책의 내용은 기억이 안난다. 초반부만 읽다가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갑자기 그 문장에 꽂혔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생각인가 하면 분리되지 않기란 목표라기보단 말 그대로 욕망이다. 내가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분리와 고립이라는 건 외모, 성향, 어린 시절의 경험 등등이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 이 모든 것은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하기에 내가 통제 가능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해석하는 능력, 즉 태도뿐이다.
외로움은 과거에 대해, 미래에 대한 전망 등에 대해 해석하는 현재의 나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다. 10초 전 내가 느낀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난 완벽히 설명하기 어렵다. 10초 전 내가 느낀 외로움은 현재의 내가 느끼는 외로움과 완벽히 일치하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10초 전에는 체온이 그리웠을 수도, 20초 전에는 눈빛이 그리웠을 수도, 30초 전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을 수도 있다. 나의 마음은 굳어 변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나의 마음의 고동을 천천히 바라보고 느끼다 보면 내 마음속에는 이 순간에도 수많은 감정들이 표류하고 있다. 그들을 잡지 않고 흘려보낸다면 아주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들여다보는 순간 난 어쩔 수 없이 표류하는 감정들 중에서 가장 익숙한 것을 껴안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내 포옹은 그 감정으로 고픈 만큼 너무나 길다. 가시투성이인 감정을 끌어안아 마음이 하루 종일 너덜너덜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잡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부드러운 자기애와 자기연민도 있지만 난 그들을 끌어안지 않는다. 난 나 자신에게 지독히도 가학적이고 피학적이기 때문이다. 난 마음이 찢기는 걸 즐기며 동시에 내 마음을 찢는 것을 즐긴다. 날카로운 가시덩어리인 외로움과 후회, 불안을 끌어안아 분리되고 고립된 나의 품속을 날카로운 상처들로 채우고 싶어 한다. 고통받는 나 자신을 보며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내가 감정을 느낄 가치가 있음을 느낀다.
물리적 자해만이 자해가 아니다. 손목에 남은 흉터만큼이나 마음속에 박힌 상처들은 지우기가 힘들다. 나의 태도는 나 스스로에게 영구적인 손상을 입히고 있다. 나는 나를 우울하고 불안한 사람으로 정의 내리고 거기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익숙한 감정을 끌어안아 소유하고자 하려 하고 있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타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이유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시간이 흐르는 게 무서운 이유도 익숙함을 끌어안고자 하는 것이다. 익숙함이 분리감과 외로움이 적던 그 시절을 영원히 지속시켜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 알고 있듯이 영원이란 건 허상이다.
이 모든 영원처럼 보이는 것들은 정확히 1초 뒤에 허상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을 무의식 속에서 믿으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소유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적 태도를 견제해야한다. 그 모든것은 소유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감정이든 그들을 깊게 내 품속에 끌어안아 소유하고 타인으로부터 숨기려고 하기보단 그들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경탄해 주어야 한다. 말그대로 자유롭게 놓아주라는 것이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분리감과 외로움 그리고 자해를 멈추게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