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존재함을 안다.
나뭇잎의 떨림, 풀꽃의 춤, 창가에 걸린 얇은 커튼의 흔들림을 통해 우리는 바람이 다녀간 자취를 읽는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도 바람이 머물다 간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따스한 손길, 스쳐 지나갔던 웃음 하나, 때로는 잔인한 상처조차도 결국은 바람처럼 흘러가며 우리의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잊지 못 할 봄날을 간직하고 있다.
그날은 특별히 화려하지 않았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지도 않았고, 누구의 축복이 크게 울려 퍼지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하루였다.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서 내게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노래가 시작되었다.
2층 책상 끝자락, 누렇게 바랜 책상 위에서 한 소녀가 바람을 따라 노래하고 있었다.
가사도, 선율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목소리에 실린 맑은 떨림이, 마치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내 마음을 가만히 감싸 안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람의 목소리도, 눈빛도, 웃음도 바람처럼 다가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바람은 늘 말을 한다.
언제나 고요한 듯, 그러나 쉼 없이 속삭인다.
아이들의 웃음이 실린 바람은 우리 마음을 젊게 만들고, 떠나간 이의 이름을 품은 바람은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남기는 말들, 그것이 결국은 바람이 되어 다른 이의 마음속을 오래도록 맴도는 건 아닐까.
따뜻한 말은 봄바람처럼, 서늘한 말은 겨울바람처럼, 거친 말은 폭풍처럼 다가와 그들의 가슴을 흔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그 바람은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날 문득, 낡은 창문을 두드리듯 기억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내 인생에서 가장 깊었던 바람은 어머니의 손길이었다.
어릴 적, 밤마다 열이 오르던 나를 식지 않는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주시던 순간, 그 손길이야말로 바람의 노래였다.
어머니는 늘 많은 말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나는 늘 바람을 느꼈다.
새벽마다 부엌에서 들리던 작은 소리들, 밥 냄새와 함께 스며드는 따스한 공기, 그것이 곧 어머니의 바람이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손등에는 깊은 주름이 패였지만, 그 바람은 여전히 내 곁에 머문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길 위에서, 직장에서, 혹은 아주 우연히.
어떤 만남은 짧아 금세 잊히지만, 어떤 만남은 바람처럼 스며들어 평생을 따라다닌다.
내가 힘들었던 시절, 누구가가 내밀어준 손
나는 응원해주던 내가 모르던 순간의 나를 알던 사람들
그 모든 순간은 바람이 되어 흩날리고 또 돌아온다.
나는 그제야 깨닫는다.
우리가 건네는 모든 말과 행동이 결국은 바람이 되어 누군가를 감싸거나, 때로는 아프게 한다는 것을.
밤하늘 별빛 아래, 나는 종종 바람에게 속삭인다.
오늘도 잘 견디게 해 달라.
내 사랑하는 이들이 평안하길 바란다.
기도는 언어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저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와 바람에 실려 어딘가로 향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 기도는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낯선 사람의 미소로,
친구의 격려로,
혹은 문득 찾아온 햇살 한 줄기로.
그럴 때 나는 알게 된다.
바람은 우리의 소망을 품고 세상을 돌고 있다는 것을.
삶은 결국 바람과 같다.
붙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지만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노래를 듣는다.
기쁨의 날에는 산들바람이 불고, 슬픔의 날에는 차가운 바람이 스민다.
그러나 어느 날 돌아보면, 그 모든 바람이 합쳐져 하나의 거대한 노래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주고받은 말들,
내가 겪은 기쁨과 슬픔들,
그 모든 순간이 결국은 바람의 음표가 되어 나라는 곡을 완성하고 있었다.
언젠가 내 삶의 끝자락에도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때 나는 바람에게 묻고 싶다.
내가 남긴 노래는 아름다웠는가?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는가, 아니면 아프게 흔들었는가?
그리고 바람은 대답할 것이다.
너는 이미 수많은 이의 마음에 머물렀어
너의 노래는 사라지지 않고, 다른 이의 바람 속에서 계속 살아갈거라고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삶은 영원히 붙잡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며 남기는 것이니까.
바람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준다.
너는 보이지 않아도,누군가의 삶에 머물 수 있다.
작은 말 한마디도누군가의 마음을 평생 흔들 수 있다.
흩날리듯 떠나는 모든 순간조차도 결국은 노래가 되어 남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람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사랑하라.
그 사랑이 바람이 되어,
누군가의 가슴을 따뜻하게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