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은 오래된 마을 끝자락에 있었다.
골목 끝, 낮은 돌담 너머로 자그마한 마당이 보였고, 그 한가운데 커다란 감나무가 서 있었다.
가을이면 나뭇가지에 주황빛 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었다.
그 집에 들어서면 언제나 같은 냄새가 났다. 나무와 햇살, 그리고 바람의 냄새.
나는 어린 시절, 매일같이 그 집 마당에 앉아 놀았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된장국을 끓이며 나를 부르곤 했다.
“밥 먹어라, 바람 더 쐬다간 추워진다.”
나는 그 말에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감나무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그 바람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마치 나를 감싸 안아주는 팔처럼.
어쩌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바람’을 특별하게 느끼게 된 건.
시간이 흘러 나는 도시로 나갔다.
화려한 간판과 복잡한 지하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다.
처음엔 모든 것이 새롭고 좋았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가슴 속에 작은 허전함이 스며들었다.
출근길 아침에도, 퇴근길 저녁에도, 나는 자꾸만 고개를 들어 바람을 찾았다.
도시의 바람은 차갑고 거칠었고, 그 안에 내가 기억하던 포근함은 없었다.
몇 년 만에 고향 집에 돌아갔을 때, 마당은 예전 그대로였다.
감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바람은 예전처럼 나를 맞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눈을 감자, 바람이 나에게 속삭이듯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느낌인지 몰라도 오래 눌러두었던 마음의 먼지가 풀리는 것 같았다.
도시에 살면서 쌓인 피로와 외로움이 한순간에 흩날렸다.
바람은 늘 거기에 있었고, 나는 바람의 속삭임을 좋아한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나는 바람을 찾는 습관이 생겼다.
아침에 베란다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새벽 달리기 전 5분동안 천천히 걸으면서 바람의 결을 느낀다.
가끔은 바람이 차갑게 불어와 몸을 움츠리게 하지만, 그것마저도 좋다.
왜냐하면 바람은 늘 지금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지금은 겨울이야, 조금 더 단단해져야 해.”
“오늘은 따뜻하네, 마음 놓고 웃어도 돼.”
바람은 계절을 알려주고, 내 마음의 계절까지 어루만진다.
삶은 계속 흘러가고, 사람은 떠난다.
그러나 바람은 남는다.
그 바람은 지나간 기억을 데려오고, 잊힌 마음을 불러낸다.
내가 지쳐 있을 때마다 바람은 말없이 다가와 속삭인다.
“잠시 쉬었다가 가자.”
그 목소리는 낮고 부드럽고 따뜻하다.
마치 오래된 친구가 건네는 위로처럼.
이제 나는 누군가의 바람이 되고 싶다.
묻지 않아도 괜찮은, 평가하지 않는, 그저 곁에 있어주는 존재.
말하지 않아도, 그냥 함께 서 있기만 해도 편안한 사람.
세상에 꼭 필요한 건 그런 존재라는 걸, 나는 바람에게 배웠다.
오늘도 나는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연다.
바람이 천천히 거실 안으로 스며든다.
그 안에는 어린 시절의 웃음, 어머니의 목소리, 감나무의 그림자가 함께 들어 있다.
나는 눈을 감고 바람 속으로 몸을 맡긴다.
그리고 속삭인다.
“고마워.”
바람은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주고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