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길

바람이 먼저 지나간 자리에서, 늦가을의 마음을 천천히 따라 걷다

by 리도씨

다가가려 하면 늘 바람이 먼저 지나간다.

손을 내밀기도 전에 가볍게 스쳐 멀어지는 것들 앞에서, 사람은 자주 자신의 늦음을 깨닫는다. 늦가을의 길을 걸을 때면 나는 그 사실을 유난히 또렷하게 느낀다. 계절은 이미 끝을 향해 기울고 있고, 나무는 더 이상 푸른 것으로 자신을 감추지 않으며, 길 위에는 제자리를 떠난 잎들이 소리 없이 쌓여 있다. 그 고요한 풍경 한가운데 서 있으면, 지나간 것들이 왜 이토록 오래 마음에 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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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몇 장이 발끝에 스친다. 바스락, 하고 작은 소리가 난다. 아주 사소한 소리인데도 그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가 있다. 어떤 소리는 귀로만 들리지 않는다. 오래전 마음속에 묻어둔 기억을 건드리며, 잊었다고 믿었던 이름 하나를 천천히 떠오르게 만든다. 늦가을의 길 위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불쑥 누군가가 생각나고, 한때 함께 지나던 시간이 희미한 빛처럼 되살아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고, 붙잡으려 할수록 더 고요히 흩어진다.




어쩌면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은 그 사람을 붙드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 안에 남긴 잔향을 오래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함께했던 시간은 이미 지나갔는데, 그 시간이 남긴 공기와 온도는 이상할 만큼 오래 머문다. 비슷한 뒷모습을 보았을 때, 익숙한 계절의 냄새를 맡았을 때,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한순간 오래전으로 걸어 들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지나간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늦가을의 나무들은 정직하다. 더는 화려함으로 자신을 꾸미지 않고, 떠날 것은 떠나보낸 채 가느다란 가지를 드러낸다. 낙엽 또한 그렇다. 가지를 떠난 뒤에야 비로소 길 위의 풍경이 된다. 떨어진다는 말은 자주 상실처럼 들리지만, 때로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자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처럼 보일 때도 있다. 나무의 일부였던 잎이 땅 위에 내려앉아 늦가을의 길을 완성하듯, 우리 마음도 흔들린 뒤에야 비로소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모양을 갖게 되는지 모른다.


내 마음 역시 그랬다. 붙잡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고, 끝내 붙잡지 못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남은 것은 상실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흔들린 자리에는 흔들려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결이 생겼고, 지나간 자리에는 지나가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남았다. 그래서 늦가을의 길은 쓸쓸하면서도 이상하게 다정하다. 모든 것이 떠나가는 계절인데도, 그 떠남의 방식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사람을 깊이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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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무언가를 붙잡으려 하며 살아간다. 사랑도, 사람도, 순간도, 때로는 이미 지나가고 있는 계절마저. 하지만 삶은 어쩌면 붙잡는 기술보다 지나가는 법을 배우는 쪽에 더 가까운지 모른다. 놓친 것을 모른 척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내 안에 남긴 의미까지 부정하지 않는 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 시간이 분명 아름다웠다고 인정하는 일. 늦가을의 길은 그런 마음의 자세를 조용히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는 낙엽 길을 천천히 걷는다. 빨리 지나가버리기엔 이 계절이 품고 있는 침묵이 너무 깊고, 너무 쉽게 이해해버리기엔 마음이 아직 다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발끝에 스치는 잎들은 마치 지나온 시간들이 남겨둔 작은 표식 같다. 어떤 것은 사랑이었고, 어떤 것은 망설임이었으며, 어떤 것은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길 위에 흩어져 있다가, 바람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다시 미세하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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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그대를 생각하며 낙엽 길을 지나간다.

크게 부르지 않아도, 굳이 붙잡지 않아도, 어떤 이름은 계절 속에서 스스로 되살아난다. 바람보다 조금 늦게, 낙엽보다 조금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한 무게로 마음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을 이제는 예전처럼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사라지는 것들 덕분에 보이는 풍경이 있고, 끝나가는 계절 덕분에 더 선명해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늦가을의 길은 말이 없다. 다만 조용히 보여준다. 바람이 먼저 지나가도 괜찮다고, 낙엽이 떨어져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고, 붙잡지 못한 것들이 있어도 사람은 여전히 자기 속도로 걸어갈 수 있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천천히 걷는다. 그대 생각이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가도, 그 여운이 길 위에 잠시 머물다 흩어져도, 그 모든 순간을 내 계절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어쩌면 그게 늦가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조용한 문장인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했던 마음까지, 결국은 다 나였다는 것.


2026년 3월 9일 "오늘의 나"


기록의 공간 : https://www.threads.com/@reedo.d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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