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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Dec 07. 2020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외의 <인생수업>

나는 참 쉽게 다친다. 수만 번도 더 지나다닌 내 방 책상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혀 멍이 들고, 식탁 의자에 발을 찍혀 살갗이 벗겨지고, 현관문 틈에서 손을 빼기도 전에 문을 닫아 버려 손가락에 상처를 남기고, 수백 번은 더 오르락내리락 한 계단을 헛딛어 발목이 꺾이고 만다. 몸과 머리의 연동에 오류가 있는 사람인가. 이것이 나란 주인공의 소설이라면, 주인공 캐릭터 설정을 바꾸고 싶을 정도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매일 하루에 몇 번씩 연고를 발라도 쓰라리고 진물만 나던 상처가 어느새 아물었다. 새 살이 돋고 희미한 한 줄기 선만 남았다. 몸에 난 상처는 이렇게 아무는데 내 삶에 난 상처는 어떻게 해야 아무는 것일까.   

   

#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배움은 무엇인가     


이 책은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배움은 무엇인가’로 시작한다. 내 삶에 난 상처들을 들여다본다. 그 상처들의 꼬리를 따라가다보니 그 끝에는 내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는 사실에 이른다. 만약 어떤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 딱 한 가지를 알려주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란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알려달라고.     


나는 내가 가장 어렵고 불편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내 자신을 나 스스로가 진정으로 아껴주지 못하기에 때때로 답답하고 외롭고 슬프고 허전하다. 나와 친하지 못해서 나 이외의 무언가로 이 구멍을 메우려 하기도 한다. 가끔은 좋아하는 사람들 덕분에 구멍이 느껴지지 않지만 결국 나는 안다. 절대로 나 이외에는 메울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배워야 할 과목들은 사랑, 관계, 상실, 두려움, 인내, 받아들임, 용서, 행복 등이다. 나아가 이 수업은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 하는 깨달음으로 우리를 데리고 같다. 그것이 이 수업의 완성이다.”(p10)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배움이 무엇인가에 대해 죽음을 앞둔 이들을 통해 살펴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배움은 결국 누구에게나 같다. 그것은 두려움, 자기 비난, 화, 용서, 받아들임, 사랑, 관계, 놀이, 행복에 대한 배움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이러한 배움들이 가리키는 것은 오직 하나다.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 삶의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삶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p19)     


즉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배워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는 나로 태어났지만 어른이 되어가며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간다. 그리고 우리는 생의 어느 시점에서 이렇게 묻곤 한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p10)”라고. 나 자신으로 살지 않은 삶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살아 있는 삶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 사랑     


사랑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사랑을 어렵게 하는가. 해변의 조개를 줍듯 모아둔 책 속 구절들을 하나하나 읽어 본다. 읽고 생각하는 동안 내 것이 된 문장도 있지만 도저히 마음속 서랍에 넣을 수 없는 크기의 문장들도 만난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 언제나 있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장벽을 없애는 것입니다.”(p52)     


사랑에 대한 저자의 수많은 표현 모두 마음에 흔적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사랑이란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는 이 말에 가장 오래 머물게 된다. 쉽게 소화되지 못한 문장이자 쉽게 소화하고 싶지 않은 문장이기도 하다.      


나 자신에 대한 경계, 타인에 대한 경계, 이 경계를 허물 때 비로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만 같다. 나는 나로 태어난다. 아기일 때는 아기인 척 연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나’라는 사람의 연기를 하게 된다. 부모가 원하는 나, 이상 속의 나, 사회가 존경하는 나, 그런 나들만 남고 진짜 나는 사라진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 안에 수많은 선을 긋는다. 그 선들이 이어져 원이 되고 사각형이 되고 오각형이 되어 틀이 만들어지고 이 틀은 경계가 된다. 그렇게 나란 사람이 만들어진다. 이 틀 속에 갇힌 나는 어쩔 수 없이 때때로 숨이 막히고 외롭고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분명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지만 진짜 사랑은 모른다. 내가 가진 사랑은 어린 시절의 흔적일 뿐이다. 사랑은 주는 것임을 머리는 알지만 두려움에 사랑을 주기보다는 받기만을 바라게 된다. 사랑을 움켜쥐고 있기에 불안하고 불안하기에 내가 그린 그림 안에 그를 넣어야 안심이 된다. 이렇게 타인과의 사랑에 있어서도 선이 생기고 선은 틀을 만들고 틀이 모여 경계가 된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자신이 미리 갖고 있는 기준을 버릴 때, 누구를 얼마나 오래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해방될 수 있습니다. 신에게 선물 받은 위대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이런 한계들을 뛰어넘어야 합니다.”(p80)     


내 안에 생긴 경계, 나와 그 사이에 생긴 경계. 이 경계는 한계가 되고 규정이 되고 불가능이 되며 구별이 된다. 이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 나는 자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고 나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경계는 뛰어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해야 한다.      


# 관계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보지 못했다. 그것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중 ‘침묵의 미래’라는 단편이다. 이 단편 속 주인공은 소수언어박물관의 화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이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들이며 오래전에 버려진 존재이며 말에 대한 지독한 향수병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관계를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김애란 작가의 이 단편이 떠오른다.      


우리는 모두 마지막 화자들이다. 나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으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도 이 세상에는 없다. 우리에게 모어는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서 안하고 싶다고 그만둘 수도 없다. 우리는 언어와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녀의 이런 표현에 감탄하면서도 한편 마음이 아리다. 그녀의 모어와 나의 모어는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김애란 작가의 호흡이 담긴 그녀의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때로 텅 빈 공간이 되라. 다른 사람이 지나다니게 하라. 자신 안에서 세계의 영혼을 발견하고, 인간 안에서 신의 정신을 보라. 그것이 진정한 관계이다.”(p61)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나를 이해시킬 수도 없다. 우리는 서로를 변화시킬 수 없다. 만약 변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다. 이 사실을, 이 한계를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 다른 모어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텅 빈 공간이 되어 그가 내 안에서 자신의 모습 그대로 머물 수 있게 해야 하며, 나 또한 그 안에서 나 그대로 머물 수 있을 때, 그럴 때 우리의 진정한 관계는 성립이 된다.   

   

# 상실     


상실에 대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결국에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과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들과 작별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결국엔 자신의 내면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p94)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나의 재산도 학력도 경력도 명예도 재능도 내가 될 수 없다. 내가 가진 소유물은 내가 아니다. 사실 나는 아직 이 말의 의미를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무언가. 그것이 무엇인지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 나에게 있어 그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글은 나에게 있어 육신이 없는 영혼의 공간이다. 내 글이 뛰노는 곳에는 이름도 없고 학력도 경력도 재산도 아무것도 없다. 이 글 안에는 오직 나의 이야기만이 들어 있다. 각 생의 시점에서 만난 사람과, 그 시점에서 읽은 책, 그때의 숙성되지 못한 인생의 고민들이 서툴게 뒤섞여 있다. 글 속의 나는 목소리만 있고 생각만 있고 추억만 있다. 몇 년 전 글을 읽으며 그때의 나를 만난다. 변함없는 나도 있고 변한 나도 있다. 만약 지금 내가 당연한 듯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잃게 되어 종국에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 글 속의 나는 영원히 나로 살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무엇이냐고 만약 지금의 나에게 묻는다면 글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 글 또한 영원하지 않음을 안다.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쓸 수 없는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욕심에 쓸 수 없을 수도 있고 또는 쓸 수 있는 행위 자체를 할 수 없는 육신이 될 수도 있다. 이마저 사라진다면 나는 결국 무엇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을까.      


# 두려움      


두려움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두려움은 우리를 지켜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두려움은 사랑과 행복, 자기 존재의 확인 등 모든 것을 가로막는 그림자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종종 분노, 불안 등의 다른 옷을 입고 있어서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두려움을 알고 있다고 믿기 쉽고 당연하게 필요한 감정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우리의 내면에는 (...) 사랑 또는 두려움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두려움이 있는 곳에 사랑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 둘 중 어느 쪽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그곳에 중립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선택하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 안에서 두려움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을 발견하게 됩니다.”(p159)     


우리에게는 수많은 감정이 있지만 그 근원에 있는 것은 사랑과 두려움 두 가지뿐이다. 사랑인지 두려움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설탕 반, 소금 반처럼 사랑과 두려움을 적절히 넣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두려움은 가끔 걱정이나 분노, 방어 등의 가면을 쓰고 누군가를 향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근원을 파헤쳐보면 밑바닥에 있는 것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다른 감정들로 덧칠한 것일 뿐이다. 두려움은 항상 과거에 일어난 어떤 경험이나 일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두려움에 맞설 용기가 필요하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으로 채울 때, 두려움을 걷어 낼 수 있습니다.”(p161)


나에게는 오랜 삶의 숙제가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 삶의 의미를 아는 것이 그것이다. 나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타인 또한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거에 살지 않을 것이며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삶을 살아 있는 자로 사는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이것은 중요한 삶의 숙제가 된다. 나는 이 숙제를 풀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글을 읽고 쓰는 것, 이것이 지금의 내가 아는 최선의 방법이다.     


# 인내     


언제부터였을까. 어떤 순간 때문이었을까. 어릴 때부터 나는 나를 보며 인내와 끈기가 부족한 사람이란 생각을 해왔다. 입버릇처럼 나에게는 인내가 부족해, 라고 말하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내가 가장 어렵다. 늘 삶은 나를 기다리라고 한다. 바로 주는 것이 없다. 나의 단 하나의 소원은 언제나 보류다. 보류인지 불가능인지 이 또한 삶은 알려주지 않기에 낡아빠지고 헤져버린 소원을 주머니 속에 꽁꽁 숨겨둔채 버리지도 못한다. 그런 나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내가 주는 한 가지 배움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원하지만 한동안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식일지라도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p202)     


인내의 중요한 비밀은 “다른 방식일지라도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와 다만 그것은 다른 방식이라는 것. 바로 여기에 삶에 대한 믿음에 들어 간다. 나에게 인내가 부족했던 이유는 나에게는 이러한 삶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임을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인내심의 열쇠는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믿음, 인간이 모르는 큰 계획이 존재한다는 신뢰를 키우는 데 있습니다.”(p203)     


인내란 단지 고통스럽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겨울 너머에 봄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며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꾸고 개선해야 하는 것도 있겠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것, 어떤 일이 일어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삶이라는 커다란 시선에서 보면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아는 것이 인내다.  


# 받아들임   


받아들임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나에게 알려준 것은 알렉상드르 졸리앙의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는 책이다. 그에게 있어 받아들임, 내려놓음은 누구보다 중요한 인생의 숙제였다. 그는 선천적 뇌성마비로 세 살부터 17년간이나 요양시설에서 생활야만 했고 매 순간 자신의 장애, 결핍과 동거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에 의하면 내려놓음이란 무엇이든 확정하지 말되,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 자세라고 한다. 또한 내려놓는 삶의 태도란 자신의 나약함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라고도 표현한다. 또한 치유가 아니더라도 그 상처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받아들임이라고 그는 말한다.      


많은 이들이 말하는 받아들임에 대해 읽기는 했지만 사실 아직 나는 받아들임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모든 진리는 자신이 직접 체험함으로써 알 수 있으며 그 진리는 말로 표현될 때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게 되며 그것은 그저 한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어떤 이는 말했다. 나는 나의 삶을 통해 받아들임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다. 내 삶에서 받아들임이 무엇인지, 내 삶이 나에게 알려줄 그때, 그 순간을 위해, 지금은 이렇게 다양한 비유를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왜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삶은 우리에게 겸허함을 요구합니다. 삶은 신비이며,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p215)     


받아들임이란 싸움을 멈추는 것이고 줄다리기 게임을 끝내는 것이라고 이 책의 저자는 표현한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 강인함은 아니며, 상황에 자신을 맡기는 것 또한 나약함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받아들임은 포기가 아니다. 선척적 뇌성마비로 육신의 자유가 없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병에 걸린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것, 그것이 받아들임이다. 어떤 상황 하에서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이 참된 받아들임이다. 그럼 언제가 받아들여야 할 때인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인가 바꿔야 하고 당신에게 그것을 바꿀 힘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 평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삶에 순응할 때입니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때입니다.”(p223)     


받아들일 때와 행동해야 하는 때를 아는 지혜. 이 지혜가 우리에게는, 나에게는 필요하다.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은 후에는 삶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삶은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신비하다. 작은 나의 생각으로 찾아낸 답이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삶의 흐름에 자신을 놓을 줄 아는 것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배움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아야 한다.      


#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삶을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들은 참 많다. 하지만 그것은 중고등학교 시간표처럼 누군가가 대신 채워 넣은 수업시간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필요한 배움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닫고 찾아야 한다. 나에게 이 책은 인생의 책이다. 삶의 문제를 만날 때마다 언제든 꺼내어 보게 되는 책이다. 생의 순간마다 삶이 나에게 던지는 숙제는 다르기 때문에 나에게는 인생의 책이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서도 그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의 궁극적인 배움입니다.”(p22)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삶의 배움은 사랑, 관계, 두려움, 상실, 인내, 받아들임이다. 이 배움을 통해 나는 나로 살고 싶다. 삶의 의미를 알고 싶다. 내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 그리고 삶의 어두운 시간에도 나는 성장하고 있음을 믿고 기다리고 싶다. 이를 통해 살아있는 사람으로 현재를 살고 싶다. 즉 나는 나로 ‘존재하는 법’을 알고 싶다. 수많은 ‘~싶다’를 품은 나에게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두 살 된 아이를 잃은 부모는 그 아이가 부모에게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여기에 왔을 수도 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우는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번 삶에서는 깨닫지 못하게 될 배움들도 많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 배움입니다.”(p127)     


수많은 ‘싶다’ 속에서 배움으로써 ‘삶을 완전하게’ 하고자 욕심부리는 내가 있다. 이런 나에게 돈 미겔 루이스는 자신의 책 <내가 말을 배우기 전 세상은 아름다웠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예술이라고. 즉 우리 모든 인간은 예술가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예술품인 자신만의 삶을 창조하고 있다. 예술가인 우리에게 한계는 없으며 창조는 계속 진행되고 있고 끝이 없으며 매 순간 모든 곳에서 창조가 있다. 그러므로 예술품인 각자의 삶에 불완전함이란 있을 수 없다. 당신은 지금 그대로 충분히 완전하다. 이 사실을 믿고 우리는 자신의 예술품을 완성하면 된다. 나에게는 지금 이러한 배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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