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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쌩전 Aug 21. 2023

나를 보는 나의 변화

좋아하는게 달라졌다고 내가 달라지나?



평생 매운걸 못먹었던 내가 어느 날 문득 얼큰한 찌개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된걸까? 


나를 나로서 만드는 경계는 어디에서 출발하는 걸까. 나는 인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애써도 내가 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니라고 해서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나다움’이라는 말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자꾸만 벗어나려고 하는 걸까. 나다움을 찾기 위해 나다움을 벗어나야지만 한다는 사실은 모순적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당연하다. 나 아니면 너, 이분법은 OX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계와 규모에 대한 이야기이고 나는 그 사이에서 계속해서 진동한다. 나는 객체이면서도 주체이고, 끊임없이 진동하는 존재다. 입자이면서 파동하는 광자의 상태와도 동일하다. 나는 광자에게 이입되고, 그러므로 관찰하기 전에는 어디든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마르틴 부버는 참다운 관계로서의 ‘나-너’는 서로 인격적으로 마주하며 유일한 나와 대체불가능한 너가 깊은 신뢰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너를 바라볼 때 비로소 내가 보여진다. 우리가 대상을 바라볼 때 사실 바라보는 행위만으로도 관계가 생기고 보여지는 ‘대상’과 보는 ‘나’의 위치가 밝혀진다. 우리는 보기 전까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보는 순간 달라진다. 단순히 ‘봤다’ 이상의 것이 그때부터 펼쳐진다. 그것을 본 나, 아는 나, 알게 된 나, 보여진 너, 기억된 너, 이것은 그 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전 우주적 변화다.


사르트르는 앞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다. ‘나’는 보거나 보여지기 전까지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이고, 관심을 가진 상대에게 관찰 될 때 비로소 시간이라는 규칙 안에서 단편적 본질을 지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시간 속에 아카이빙 되며 한계를 지닌 존재로 해석되는 것이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평생 매운걸 못먹었던 내가 어느 날 얼큰한 찌개가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이 맞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나인 것도 맞다. 나는 삶의 연속성 위에서 끊임없이 달라지며, 그렇게 달라지는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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