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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Jun 28. 2016

인간과 인간존중

2016.06.28


  인간이란 무엇인가? 영장류 인간과에 속하는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되는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도구를 사용하며 직립보행을 하고 다른 생물에게 없는 고도화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존재를 말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가? 제임스 카메론의 제작으로 실사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인 SF 사이버 펑크 장르의 만화 '총몽'에서는 사이보그와 인간이 나온다. 고철 마을에는 인간과 인체를 개조한 사이보그가 살고 있으며 지상도시인 '자렘'에는 지상의 인간이 살고 있다. 지상의 인간들은 사이보그와 고철 마을의 사람들을 무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렘에 사는 지상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 뇌 대신 기억칩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패닉에 빠져 서로를 죽이며 자살하기에 이른다. 뇌가 없는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는 인간에 대철학적인 범위를 고민한다. 연금술의 실패로 인한 반동으로 한쪽 팔과 다리를 잃어 기계 수족을 달고 있는 형 에드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동생인 알의 혼을 연성해 갑옷에 동생의 영혼을 장착시킨다. 에드에게 알은 뇌가 없고 육체도 없이 혼만들어있지만 분명히 인간이다.


  위의 총몽에서 인간의 기준은 '뇌'다.  몸을 기계부품으로 바꾸었다고 해도 중심이 되는 뇌가 있다면 스스로를 인간으로 부를 자격이 된다.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인간의 범위는 굉장히 넓다. 혼만 있는 존재와 동물과 인간의 합성인 키메라도 인간으로 분류되는 강철의 연금술사에서는 인간과 대화가 되고, 기억과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인간이라 의식하는 경우 인간이칭한다.


  팔과 하반신이 없지만 뇌와 상반신이 있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당연히 인간의 범주에 속한다. 만약 어느 영화에서처럼 뇌가 살아있고 말을 할 수 있지만 나머지 모든 부분이 컴퓨터로 아웃풋이 되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 분류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머리가 있고 머리 외의 모든 부분이 기계부품으로 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인가? 머리를 가지고 있고 사고의사소통이 가능할 때 인간이라 본다면 뇌사자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뇌사'라는 것은 뇌가 죽은 것이다.  외부 자극에 반응이 없고 자발호흡이 없으며 뇌간반사에 모두 반응하지 않아 호흡기에 의지하여 인공적인 호흡을 하여 신체를 유지하는 것 외에 할 수 없는 경우를 칭한다. 만약 호흡기를 떼지 않았다면 뇌사자는 죽은 것인가 죽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뇌사자를 살아있는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만약 뇌사자가 있고 인간과 같은 사고와 의사소통과 기억을 가진 기계가 있다고 한다면 둘 중 어느 것이 인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나? 만약 장기를 가지고 인간의 모습을 한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미래에 신체를 기계부품이나 대체할 수 있는 것을 바꾸는 기술이 개발된다고 할 때 그러한 존재들은 인간으로 분류되는가?


  영화 'her'에서는 인간과 같은 사고와 의사소통을 하는 OS가 나오고 주인공인 테오도르는 그 OS와 사랑을 한다. 테오도르에게 OS는 분명히 사랑의 대상인 인간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분류해존중해주어야 하는가? 영화 '아일랜드'에서는 인간이 불의의 사고에 대처하기 위해 클론을 만들어 키운다. 그 클론의 존재 이유는 본 몸체에 장기와 부품을 제공해 주기 위함이다. 또 다른 영화 '더 문'에서는 우주에서 사는 복제인간이 있고 그 복제인간들은 죽고 나면 다시 다음 복제인간으로 교체된다. 그 복제인간들의 윤리나 생명의 중요성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동일 인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클론이 갇혀 있는 곳을 나독립적인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복제인간을 응원한다. 왜냐면 분명히 개별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범주에 있는 존재로 보이고 인간을 사고파는 행위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서비스는 어디까지 용인되는가? 분명히 우리는 인간을 사고팔아서는 안된다는 개념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사고팔아서 안되는 조건은 어디까지인가? 부부가 불임으로 고생할 때 난자와 정자를 채취하여 인공수정을 할 수 있고 이는 실제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이는 우리 모두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요즘 우리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선결조건인 정자와 난자를 모두 구입할 수 있다. 더구나 좋은 조건의 좋은 유전자를 지닌 정자와 난자를 쇼핑한 후 구입하여 인간을 만들 수도 있다. 과거에는 대리모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대리모, 즉 씨받이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를 대신하여 아이를 낳아주고 적절한 지위나 돈을 받는다. 대리모 제도는 성경에도 나와있을 정도로 오래된 인간의 전통적인 관습이다. 부부의 정자와 난자를 다른 제3세계 여성의 자궁에 착상시켜 대리 임신을 시키는 서비스도 존재한다. 대리 임신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궁을 팔아 대리 임신을 하여 돈을 벌고 자신을 관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를 노동과 같은 행위로 보아도 되는가? 이는 인간으로서 적절하고 가능한 행위로 분류할 수 있는가? 말했던 것처럼 인공수정은 모두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정자를 구입할 때와 정자와 난자를 모두 구입할 때, 대리 임신을 할 때 사실상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하지만 이러한 정자와 난자의 판매가 가능하고, 실제로 이루어진다. 이는 분명히 인간을 사고파는 행위지만 정당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구매자는 적정한 금액을 냈고, 판매자는 자신을 관리하여 계약에 따라 매매가 성립되었다. 서로 인정한 거래니 이 또한 윤리적으로 문제 없는 행위인가?


  만약 아이가 장애를 가진 것을 알았을 때 낙태를 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로 볼 수 있는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 아이를 낙태하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언제부터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  착상되어 있는 배아를 인간으로 보아도 되는지는 많은 주장으로 나뉘겠지만 태아가 삶을 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엄마도 자신의 미래와 삶을 택할 권리가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지가 논란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택하기 위해 태아를 없애는 것이 부적절한 행위라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반대의 시각에서는 누구도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살 수 없기 때문에 개인의 선택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의 삶의 고통을 대신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위에 적혀있는 대리 임신이나 씨받이도 마찬가지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개인의 선택과 거래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노예를 사고팔았으며 인간의 윤택한 삶을 위해 노예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문서들이 존재했다. 사실 인간을 사고파는 행위가 금지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1861년에 벌어진 미남북전쟁에서 북부의 링컨이 인도주의적입장으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농업 중심의 남부의 세력을 약화시키인구를 분산시켜 산업화된 북부의 인력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것이다. 남북전쟁은 인도주의적 전쟁이 아닌 산업화의 갈등에서 빚어진 전쟁이다. 사람을 사고파는 행위는 분명히 금지인데 노동력을 사고파는 행위는 가능하다.  그렇다면 성매매는 왜 반대되는가? 자신의 성을 파는 행위는 노동력을 파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사실 성매매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동일하다고 볼 만큼 오래된 산업이다. 성매매는 어찌하여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닌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위로 분류되는가?

 

  전쟁이 벌어질 때 민간인 학살은 도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병원이나 학교를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당연한 행위이다. 다량 살상 무기의 생산과 사용이 반대되는 이유는 민간인이 동시에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의 목적이 승리를 하는 것이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이길수만 있다면 대부분의 행위는 그들에게도, 타인에게도 정당화된다. 민간인이라 하더라도 잠재적인 위협으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이 민간인을 살려줌으로 인하여 아군에게 피해가 온다면 그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인정되는 행위인가? 이것은 인간존중을 위해 필요한 행위라 볼 수 있는가?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은 사실상 인간성이 상실된 도구로 활용된다. 군인들은 전쟁을 겪은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경우가 많다. 나라는 군인을 사용하여 전쟁을 하고 목적을 이루지만 급여 지급이라는 계약을 맺어 사용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물론 나라가 비공식적, 공식적 계약을 맺기는 하지만 사실상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애국심을 요구하고 그를 활용한다. 적절한 계약을 맺었으니 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법적 책임을 벗어날 수 있는가?


  영화 '아가씨'에서 김태리는 아이들이 정말 잘 자랄 수 있는 곳으로 입양을 보내며 진심으로 기뻐한다. 비록 아이를 매매하기는 하지만 김태리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돌보고 정말 행복하게 자랄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아이들의 해외입양을 많이 했다. 해외 입양이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이민을 간 아이들이 잘 자란 경우가 존재한다. 아마 아이를 버리고 싶어서 버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집에 경제적, 심리적인 여유가 없을 때 아이를 해외로 입양을 시키는데,  그 아이들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친부모는 자신의 아이에게 미안해하고 입양된 아이들은 부모를 찾아서 한국에 들어온다. 만약 행복의 총량을 따진다면 친부모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적절한 선택을 했다고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아이를 입양시키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행위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윤리적으로 적절한 일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위에 말한 것처럼 대리모는 실제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고  옛날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있을 수 없는 행위들도 현재는 용인되어 과거에 비난받았을 일들이 지금은 자연스럽이루어지기도 한다. 조선시대 유교를 기준으로 삼으면 비난받을 행위들이 많이 있겠지만 반대로 그 당시보다 지금이 훨씬 더 인간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다. 최소한 명확한 신분제나 노예제도는 없으니 말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백성들은 나라에 대한 애정과 소속감이 없어 처음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일본군에게 길을 터주고 심지일본군에 지원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그 사람들은 나라에서 받을 처벌이 두렵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삶에 힘겨워 일본에 정착했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인간이 보호를 받은 것도  최소한의 복지가 이루어진 이후이며 영국의 구빈원 이후로 생겨난 흐름이다.  물론 역설적으구빈원에서는 6살짜리 아이에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하루에 12시간에서 16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며 착취를 당했고 구빈원이 생겨난 것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자가 보호를 받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있었으며  대표적으로 전태일의 희생이 있었다.


  이처럼 인간을 사고파는 행위는 노동력을 사고파는 행위와 다르게 볼 수 없다. 인간의 판매와 노동력의 판매는 긴밀하게 이어져 있어 특별한 장벽과 조치가 없다면 언제든지 인간은 재산과 도구로 사용되어 버린다. 상호 간 계약을 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성을 버리는 선택의 계약은 경제력이 부족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만약 경제적, 사회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대리모를 하거전쟁에 참여하여 인간성을 버리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업무에 있어서인간성을 버리는 '을'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계약들은 사실 불평등한 계약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사고파는 도구로 이용하는 이유는 남아있는 방법이 없고, 사회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마다 기준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위에 나와 있는 사례들처럼 우리는 그것들을 본능적, 학습적으로 거부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인간이 존중받을 수 없다. 기업을 이끄는 사람들이나 군대에서는 인간을 인간이 아닌 단순한 재산이나 소유로만 보며 장기말 이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수족을 잘라내고 버릴 수 있다. 가치의 최우선을 이익에 두기 때문이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가치를 최우선으로 둔다면 인간은 보호받을 수 없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인간의 범주에는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 그 기준에 포함된다. 의사소통도 사고도, 뇌나 신체의 유무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개념이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라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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