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 Dec 04. 2023

여자 속옷 100장 산 남자

변태스럽다. 여자 속옷, 그것도 100장이라니. 사실은 훨씬 넘긴다. 그 이상 세어보지 않았을 뿐.

   


 이 남자의 여자 속옷 구입은 10여 년 전 그 시작을 알렸다. 남자는 본래 쇼핑을 좋아하던 사람이다. 아니 환장한다. 반짝거리는 설탕물이 얇게 입혀진 탐스런 딸기 탕후루를 눈앞에 둔 요즘 아이처럼, 쥐어진 돈이 있을 때 이성은 저 멀리 달나라로 가버리는 모양이다. 틈만 나면 아울렛이나 코스트코, 그것도 안 되면 다이소라도 가고 싶어 눈알을 뱅글 굴린다. 17년 전 여자친구에게 파스타를 해주겠다며 11만 원이 넘는 장을 보던 사람이다. 그 돈으로 사 먹는 게 낫겠다며 말렸지만, 자신을 위해 아끼지 않는 그가 사랑스러웠던 철없던 여자친구는 얼마 안 가 발등을 찍고 싶었다. 그런 그가 하와이로 출장을 갔다. 태평양의 낙원, 그는 쇼핑의 천국이라 부른다.


 USD 2.54, USD 12.9, USD 78.3, USD 116.8. 날개도 없는 문자가 짧은 간격으로 날아온다. 게다가 숫자가 계속 커진다. 그의 뱃속에 들은 건 풍선인가 간인가, 숨 쉴 때마다 커지고 있다. ‘그만, 그만!’ 메시지엔 답이 없어 여자는 전화를 건다.

“그만 좀 사, 지금 60만 원 넘었어!”

“자기야~ 여기 살 게 너~무 많아, 옆에 선배는 600만 원짜리 시계 샀어. 난 그 정도는 아니잖아”

미친 건가. 남이사 뭘 사든. 여자는 카드를 정지시키겠다 협박했지만 실상 불가능하다. 명의가 그다. 젠장. 하와이 가서 쇼핑 한 번으로 60만 원.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출장 기간이 한 달 반이라는 사실. 첫 주말이 이러면 두 번째 주말에는 얼마나 쓸지, 여자는 벌써부터 골이 아프다. 대체 뭘 샀냐고 물어도 비밀이란다. 그래 이제 떨어져 있다고 막 나가는구나.


 평소에도 마트에 가면 남자는 담고 여자는 뺀다.

“자기야 이거 우리 침대 옆 협탁에 놓으면 예쁘겠다 그치?”

“아니, 안 어울려”

남자가 카트에 담은 물건을 여자가 모조리 빼고 나면, 남자는 삐진다.

“우리 집처럼 간식 안 사는 집도 없을 거야!”

평소에 꾹꾹 밟아 누르고 있던 쇼핑본능을 오늘 다 싹 틔울 심산인가, 통화 후 잠시 뜸하던 메시지가 또 날아온다. 그의 뱃속 풍선, 아니 간은 이미 숙소에 두고 왔다는 것을 여자는 그제야 깨달았다.

     

 두 번째 주말. 웬일로 조용하다. 걱정과 다르게 문자가 안 오니 다행이지만 뭔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진다. ‘지난주에 맘껏 샀으니 이번 주는 정신 차렸겠지?’ 셋째, 넷째 주 주말에는 소소하게 간식을 사 먹는 정도였지만 집에 올 때가 되어가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 그, 오늘은 구경만 하러 간단다. 믿기지 않지만 막을 방법이 없다. 잠시 후 메시지가 오기 시작한다. 슝~탁, 슝~탁, 연속으로 날아오는 미사일이 박히는 곳에 여자는 서 있는 것 같다. 그럼 그렇지, 심호흡을 한번 하고 확인한다. 어라, 결제 문자가 아니네? 온갖 디자인의 가방 사진이 나열되고 있었고 그 끝에 ‘골라봐’라는 글자가 있었다. 여자는 명품을 잘 모른다. 그래서 딱히 욕심이 없었던 터라 ‘됐어, 마음만 받을게’ 했다. 그냥 넘어갈 남자가 아니지만 여자는 다음에 직접 가서 고르겠다는 말로 겨우 남자를 달랬다. 대망의 마지막 주말, 여자 손에 땀이 고인다. 제발 한을 그냥 가슴에 담고 와라. 오전 6시 28분. 빗나감 없이 날아오는 문자 메시지, USD 252.36. 주문을 외우면 뭣하나, 태평양은커녕 동해도 못 건너는 것을. USD 370.0. 여자의 주문인지 기도인지 모를 바람을 남자는 콧바람으로 ‘흥’ 하고 날려버린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여자는 *알라모아나를 폭파시켜 버리고 싶다.

     

 드디어 남자가 귀국하는 날, 여자는 회초리를 여러 개 가져다 놓고 아이가 오기를 기다리는 엄한 엄마의 모습이다. 현관문을 열고 사람이 아닌 가방이 먼저 들어왔다. 갈 때는 없던 새로운 가방이다. 산 물건을 담을 데가 없어 가방을 샀다고. 가방을 열어 물건을 하나씩 꺼내 늘어놓으며 설명을 붙인다.

“이거는 자기 청바지, 이건 츄리닝 바지랑 후드티, 이건 홍삼이랑 종합비타민, 이 센트룸은 우리나라에는 아직 나이대별로 만들어진 제품은 안 들어왔는데 원산지라 있길래 센트룸 우먼 사 왔지. 그리고 요건 자기 샤워가운이랑 인형, 시계, 이거는 마카다미아 초콜릿, 아, 맞다 이건 우리 자기 운동복 그리고 이건 가방. 자기가 됐다 그럴 줄 알고 나갈 때 인천서 샀지~”     

여자는 어이가 없다.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늘어놓은 물건들이 대충 봐도 스무 가지는 되어 보인다. 아직 물건을 꺼내고 있는 남자 앞에서 이 타임에 감동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지만, 여자를 위한 쇼핑인지 참고 지내왔던 남자가 보상받는 마음으로 쇼핑을 위한 쇼핑을 한 건지 헷갈린다. 물건들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으로 욕이 나온다. ‘그리 눈썰미가 없냐, 청바지는 분명 키즈라고 쓰여 있지만 미국 키즈는 죄다 해리 포터 호박이냐고, 옆으로 아래로 다 크잖아. 이 츄리닝 바지 입고 나가면 사람들은 내 앞에서 두 손 모으고 ’ 스님‘하고 인사할걸. 후드티가 XS 사이즈인데 왜 이래? 아빠 옷 입은 다섯 살 아이 같잖아, 내 손이 안 보인다고. 그리고 나 약 싫어해, 홍삼이고 비타민이고 안 먹는다고.’ 차마 내뱉지 못하고 눈으로만 욕하던 여자는 돈 많이 썼다고 혼내려던 마음은 어디 가고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거 하나는 있겠지’ 하며 어느새 기대란 걸 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이라며 남자가 가방에서 꺼낸 건 속옷, 여자 속옷이었다. 끝을 모르고 나오는 그것은 팬티만 족히 스무 장이 넘어간다. 순간 이제껏 자신이 알던 남자가 맞는지 여자는 다시 한번 그를 찬찬히 뜯어본다. ‘혹시..’ 여자의 이상한 눈빛이 남자에게 닿았는지 신나게 꺼내다 말고 자세를 고쳐 앉아 말을 잇는다.

     

“저기.. 고백할 게 있는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줘. 사실은 나.. 자기가 어머님 댁에 있을 때 자기 속옷 하나 훔쳤었어. 우리 결혼하던 날부터 우리 집 때문에 계속 싸우고 자기가 나랑 안 살겠다고 친정 가버렸을 때 나 정말 죽고 싶었어. 근데 내 선배 중에 와이프가 무당인 사람이 있는데 자기 집에 한 번 와보래. 갔더니 본가에 산바람이 불었다며 굿을 해야 자기가 돌아온다는 거야. 근데 자기 속옷이 필요하다잖아. 그래서 처갓집 갔을 때 몰래 하나 훔쳤었어.”

여자는 뭔 소린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잠깐만, 뭐라고? 굿을 했다고?”

“응, 세 번.”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그런 걸 대체 왜 했어? 그럼 돈을 얼마나 쓴 거야?

”다해서... 천만 원. “     

여자의 말문이 막혔다. 결혼하던 즈음부터의 시간을 빠르게 훑어 나갔다. 세례명까지 있는 그가 굿에 돈을, 그것도 천만 원씩이나 쓰다니. 심각한 표정의 여자를 앞에 두고 초조했던 남자는 재빨리 분위기를 바꾸려 초등 남자아이 같은 얼굴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때 훔쳤던 속옷으로 굿을 했고 돈은 썼지만 덕분에 여자가 돌아왔다며 자신은 그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대신 태워버린 그 속옷보다 더 좋은 것으로 원 없이 사주고 싶었다고. 여자의 눈앞이 훅하고 흐려졌다. 조용히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한 남자가 안절부절못하다 한다는 말.

”근데 자기야 이거 다 산 건 아니야. 여기 팬티 세 장은 서비스로 준 거야. 내가 가게 들어가서 자기 속옷을 사려는데 사이즈를 모르겠잖아, 그래서 점원한테 물어봐서 대충 비슷한 사이즈로 고르는데, 고르다 보니 주변에 여자만 있고 나만 남자인 거야. 갑자기 창피해져서 막 담았는데 숙소 와서 보니 다른 사이즈도 있더라고. 근데 계산할 때 점원이 나보고 귀엽다고 이거 세 장 더 줬어. 나 미국에서는 먹히는 얼굴인 거야? “

‘풋’하고 여자가 웃어 버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자는 여자를 놀린다. ‘울다 웃으면 큰 일 나는데~’

     

 여자를 위한 스물세 가지 선물과 가족들에게 줄 선물 몇 가지 포함 약 230만 원을 쓴 간 큰 남자. 당시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던 외벌이 동갑내기 부부에게 한 달 수입에 맞먹는 돈을 쓴 이 남자를 여자는 용서를 해줘야 할지 혼을 내야 할지 아직 고민이다. 그런데 남자는 또 고백을 한다. 사실은 출장 가서 쓰라고 회사에서 나온 돈이 있었는데 두 번째 주에는 그 돈으로 자기가 쓸 물건을 샀노라고. 그리고 남은 현금이라며 달러 몇 장을 내밀었다. 여러 감정이 몰려왔지만, 돈 많이 쓴 거 안다며 다음엔 그러지 않겠다고 얘기하는 남자 앞에서 여자는 다음엔 카드 못 준다는 말과 살짝 눈을 흘기는 것으로 쌓아두었던 회초리를 모두 갖다 버렸다.     


 그 뒤로도 남자는 다시 하와이, 뉴질랜드, 일본 등으로 출장을 갈 때마다 여자의 속옷 선물은 빼놓지 않았다. 물론 매번 한 세트가 아니다. 이걸 다 언제 입냐고 이제 그만 좀 사 오라는 여자에게 ‘한 번 입고 버려도 돼’라고 남자는 말한다. 코로나로 출장이 막힌 이후로 남자는 알리익스프레스에 재미를 붙였고, 국내 속옷 브랜드와 운동복 세일 광고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당신근처마트(당근)이 아닌 게 어디냐. 이제는 처음의 의미보다 쇼핑에 중독된 거 같아 용돈을 줄였다. 그럼에도 뭔가가 자주 현관문 앞에 있다. 여자는 슬며시 불만이 품어진다.

‘나도 내가 입고 싶은 속옷 좀 사자’.

     

덧붙임) *알라모아나 : 하와이의 대표적인 쇼핑센터로 세계 최대의 야외 쇼핑몰

    

사진출처 : Unsplash,pixaba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