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 관한 이야기(2)
<할 말 많은 편지>는 서로를 돌보고 싶은 두 20대 여성의 다정한 시선을 담아낸 교환 편지입니다. 여섯 번째 주제는 ‘어른’입니다.
안녕, 키키.
오랜만에 돌아온 사하입니다.
키키는 ‘엠지(MZ)’라고 불려본 적 있나요?
M세대와 Z세대, 그러니까 10대 후반부터 30대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신조어가 MZ죠. 엠지 세대는 유행에 민감하고 디지털 기술에 능숙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일에 서슴지 않는, 한 마디로 ‘알잘딱깔센’인 청년으로 해석되곤 해요.
소위 ‘꼰대’의 반의어라 할 수 있겠지만, ‘요즘 애들’의 멸칭처럼 쓰이기도 합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회사에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거나 상사의 업무 부탁을 무시하는 등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룰을 거스르는 ‘MZ 빌런’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죠.
MZ에 대한 과분한(?) 해석은 단순히 웃고 즐기는 용도로 그치지 않는데요. 최근에는 정부가 ‘주 69시간 노동시간 개편’을 추진하면서 MZ 세대를 정책을 지지하는 주요 집단으로 언급했죠. ‘MZ는 더 일하고 싶어 한다’, ‘요즘 MZ는 회장 나오라고 할 정도로 권리 의식이 뛰어나다’ 같은 발언들은 그 자체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몇 가지 통계들을 연달아 보게 되었는데요. 20대 직장인의 절반이 1년 간 연차를 6일도 쓰지 못했다는 조사가 있었고요. 성인 2명 중 1명이 ‘돈’을 이유로 결혼과 출산을 기피한다는 발표도 있었고요. 취업 준비나 구직 활동 없이 ‘그냥 쉬고 있는’ 청년의 수가 지난해 50만 명으로 역대 최고이고, 그 이유로 ‘몸이 좋지 않아서’라고 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는 조사도 있었습니다.
저 숫자들이 어떤 사회적 진실을 담고 있는지는 복잡하고 면밀한 분석이 필요할 테지만요. ‘할 말 다 하고 당당히 자기 삶을 즐기는 MZ’의 실체가 묘연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갑자기 MZ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MZ에 대한 해석과 현실의 괴리가 ‘어른’이라는 규범의 양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요.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소신과 욕망을 따르며 정해진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삶을 즐기는 MZ는 꼭 ‘멋진 어른’의 표본 같죠. 하지만 그러한 어른이 되려면 평균 이상의 능력과 노력, 그것을 뒷받침하는 재력과 운이 필요합니다.
능력과 노력과 재력과 운이 좀처럼 잘 따라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른이란,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무엇일까요. 한국 사회에서 어른으로 인정받으려면 첫째로 돈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그 돈을 벌기 위한 행위(주로 노동)를 해야 하죠. 앞서 말한 네 가지가 두루 뒷받침된다면 두 가지 조건은 제법 수월하게 충족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현실'이라고 불리는 것을 맞닥뜨려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몸과 마음이 다치고 꿈이나 믿음들이 꺾이고 자기 안의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죠.
그래서 저는 어른이 되기가 싫습니다. ‘어른이란 무엇일까’라는 키키의 어른스러운 질문에 ‘어른이 되기 싫어요’라는 답이라니 면목 없습니다만, 정말이지 어른이 되는 일은 무섭습니다. 여러 고달픈 현실들을 통과한 끝에 제가 모든 것을 우습게 여기는 어른이 될까 봐 무서워요. 어른이 되려다가 자기 자신조차 되지 못할까 봐 겁이 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어른이 되기 싫다는 생떼만 남길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어떤 어른이 되기 싫은지가 아니라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를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음의 문장들이 떠오르더라고요.
(...) 성장해가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왔습니다. 특히 의류 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1969년 12월 19일 전태일 열사가 근로감독관에게 쓴 진정서 중
제가 몇 번을 다시 읽은 부분은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라는 말인데요. 이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의 삶과 고통을 자신의 것, 글을 읽는 사람의 것, 나아가 이 사회 전체의 것으로 바라보고 있죠.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사랑스러운’이라는 형용사는 ‘여러분’(독자), ‘전체’(사회), ‘일부’(노동자들, 그 자신)을 중의적으로 수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타인과 삶과 세상을 귀하게 봤어요. 너무 사랑스럽고 귀한 것이라 고통스럽고 잔혹한 그대로 남겨둘 수가 없었던 거겠죠.
전태일 열사가 보여준 어떤 이타심이나 희생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스물두 살의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가 가진, 아주 소박하고 ‘어른스러운’ 마음을 말하고 싶었어요. 바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이요. 나의 행복과 그와 연루된 누군가의 행복과 우리 사회 전체의 행복을 이뤄내고 싶다는 마음, 이뤄낼 수 있다는 믿음을 함부로 내버리지 않는 마음이요. 저는 그 마음을 잃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그 과정에서 때로 다치고 무너지기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사랑스러운 우리 각자의 삶, 각자의 과정을 귀하게 여기자고요. 그리고 행복해지자고요. 이건 제 자신에게, 그리고 멋진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행복을 포기하지 맙시다. 행복한 어른이 되어봅시다.
2023.4.9. 사하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