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기의 반대말을 찾는 오른손을 위한 안내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만들기의 반대말> 콘텐츠를 더 발전시켜 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간 모야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던 친구가 불쑥 말했다. “글루건을 처덕처덕 많이 쓰는 게 문제면, 차라리 글루건을 잘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낫지 않아?”
오- 이건-
새로운 관점이군.
일견 옳은 말이다.
글루건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깔끔하게 사용하기. 그게 된다면 작은손들의 작업물 완성도가 높아지겠지. 그것도 나쁘지 않다. 내 작업의 결과물이 멋지면 뿌듯하고, 전시되면 자랑스럽고, 능숙하게 도구를 사용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으면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간다. 그 결과, 만들기에 더욱 재미를 붙여서 모야에 더 자주 올 수도 있다. 좋다.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어쩐지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좋긴 한데,
아니다.
그것은 어쩐지 ‘내가 생각하는’ ‘모야의 만들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왤까?
자문해 봤다.
나는 왜 모야에서, 작은손들에게서 잠시 (실은 영구히) 글루건을 빼앗고 싶어 하는 걸까.
글루건은 대다수 오른손에게 뜨거운 감자 같은 것이었다.
"만들기를 어렵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줘요."
"이걸 쓸 수 있는 게 좋아 모야에 온다는 작은손도 있어요."
"웬만한 건 해결되니, 작은손이 잘 안 되는 것에 도움을 청해와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죠."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글루건만 써요. 이건 거의 만능이니까, 재료나 제작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아요."
"줄을 서야 하는 때도 생겨요. 글루건을 쓰려고 기다리다 관두고 가버리는 친구도 있고요."
"글루건으로 뒤덮인 재료는 다시 활용하기 어려워서 결국은 다 버리게 돼요."
"글루건으로 고정하고 나면 변경이 어려워서 그런지 중간에 뭐가 잘못되면 그냥 버려 버리더라고요."
"다칠 위험이 있어 작은손이 글루건을 쓸 때는 지켜봐야 하는데, 그것만 하다 하루가 끝나버리기도 해요."
등등
등등
등등
작은손을 직접 만나는 오른손의 고민은 구체적이고, 합리적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해결책을 찾아볼 요량으로 머릿속에 넣어두곤 했다. 그래서였나? 답을 모르는 고민으로 이제는 머리가 꽉 차버려서, 글루건을 없애자는 결론이 튀어나와 버린 건가?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아니다. 그보다는 -
(번쩍), 불현듯 그 이유가 떠올랐다.
그것은 글루건은 무인도에서는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들기를 통해 어린이에게 어떤 경험을 주고 싶으냐거나,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나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무인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어린이가 되길 바란다.”
농담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던데, 진심이다.
나는 작은손들이 무인도에 떨어졌을 때 좌절한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 이런. 뭐, 어쩔 수 없군. 일단은 할 수 있는 일부터 할까?”하며 손을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란다.
모야에 앉아, 그곳이 무인도라고 상상해 보자.
물론 모야는 안전하고, 머리 위는 형광등으로 환하며, 또 분명 가까운 곳에 사람들이 여럿 함께 있을 테지만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우리가 동화에 자주 나오는 것처럼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났고 침몰하는 배에서 죽을힘을 다해 헤엄쳐 이제 막 해안에 발을 디뎠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파도는 아직 거칠고, 조만간 다시 비가 쏟아질 것 같다. 부서진 배에 실려있었을 물건들이 파도에 떠밀려 와 모래톱 곳곳에 얕게 묻혀 있다. 아직 섬을 둘러보진 않았지만 - 그런 설정이므로 - 이곳은 무인도다.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나라면 우선 해변에 떠내려온 문명의 물건들을 최대한 많이 수집할 것이다. 어디 쓰일지는 몰라도, 써야 할 때 없는 것보단 쓸모없어도 갖고 있는 편이 낫다. 그런 후엔 거처를 마련하고, 불을 피우고, 먹을 것을 찾고, 구조 신호 보낼 방법을 궁리하는 등 시시각각 닥치는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려 하겠지.
비슷한 사고를 거쳤다고 치고, 먼저 잠시 머물면서 밤 동안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막집부터 만들어볼까?
마침, 우리는 섬(숙련자의 상자)을 돌아다니며 운 좋게도 굵직한 나뭇가지(나무젓가락)와 찢어진 배의 돛과 침대 시트 등(펠트, 천 혹은 종이 조각 몇 개)을 구했다.
이제 이것으로 텐트를 만들어 머리 위로 세우면 된다. 먼저 천들을 이어 붙어야겠지.
어떻게 하겠는가.
글루건을 쓰겠다고?
나약하긴.
앞에서도 말했지만, 무인도에선 글루건을 쓸 수 없다.
그럼, 무인도가 된 모야에서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칼.
우선은 칼이다. 칼은 섬에서도 만들 수 있다. 조개껍질, 동물의 뼈, 잘 깨지는 돌을 찾자. 아니면 적당한 나뭇가지를 골라 날카로워질 때까지 돌에 문지르는 방법도 있다. 같은 원리로 송곳도 만들 수 있다.
끈.
끈도 구할 수 있다. 줄기를 잘라 바닥에 대고 문질렀을 때 가닥가닥 나누어지는 식물을 찾으면 된다. 끊어지면? 몇 가닥을 모아 꼰다. 우리 조상들이 괜히 시간 날 때마다 새끼를 꼬았던 게 아니다.
바늘.
바늘은 어떻게 할 거냐고? 중요한 건 끈이 천을 통과하는 것이지 바늘이 아니다. 나뭇가지 끝에 끈을 묶든, 손으로 하나하나 끼워 넣든, 구멍을 그것에 맞게 뚫으면 해결될 일이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벌써 칼, 끈, 바늘. 세 개의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이다음부터는 이어 붙인 천을 기둥에 고정하고, 텐트가 쓰러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만드는 문제를, 역시 하나씩 해결하면 된다.
나는 끈으로 바느질하듯 천끼리 깁는 방법부터 떠올렸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 혹은 실패해도 -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어떤 건 투박하고, 어떤 건 복잡하고, 어떤 건 터무니없이 어렵겠지만, 괜찮다. 모야의 선언문에도 나오듯, 만들기에 정답은 없다. 다만 무수히 많은 해답이 존재할 뿐이다.
모야 매뉴얼을 쓸 때, 나는 어린이의 제작 활동을 모험에 빗대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이나 우정, 사업과 학업, 때론 인생 전체까지도 모험에 비유되곤 한다는 점에서 식상한 선택이긴 했지만, 과정에서 시련을 만나고, 무언가를 배우고, 동료를 얻고, 성장하면서 결국 출발할 때와는 다른 지점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모험보다 더 적합한 비유는 찾을 수 없었다.
제작 활동은 모험이다. 그리고 모험은 굴곡이 많을수록 재미있다. 당장은 힘들어도 결국은 그것을 통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돌아 돌아 제자리라고 해도 무용담은 생긴다.
그런데 만능 도구인 글루건은 종종 그 모험기를 밋밋하게 만들어버린다. 모야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출구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아직 모르는 미로 안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눈앞에 탈출 경로가 굵게 바닥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선을 따라가면 출구가 나온다. 하지만 선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무언가가 있기나 할는지 의심된다. 무엇보다 한 번 헤매기 시작하면 이 안전한 자리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선을 따라간다. 대개는 그렇다. 우리는 보통, 정답을 알면 더 이상 다른 해답을 찾으려 들지 않는 경향이 있다.
앞서 글루건 잘 쓰는 법을 알려주라던 친구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글루건만 쓰면 만들기의 재미를 풍부하게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어른의 생각이고, 그것 때문에 글루건 사용을 막는 건 어린이의 자유로운 만들기를 방해하는 거야.”
오- 이건-
별로 새로운 관점은 아니다.
그 부분은 <만들기의 반대말>을 기획할 때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모야는 작은손이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해놓고, 이제 와 제약을 두다니. (심지어 2024년 <만들기의 반대말> 프로그램은 항상 자신이 만든 것을 스스로 해체해 재료 상태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해체하길 주저하는 작은손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했다)
익숙한 만들기에서 벗어난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 제약이 작은손에게 재료의 물성을 좀 더 깊게 탐색하고 사물의 연결에 대해 고민해 볼 기회를 주리라는 것도, 그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즐거움을 주리라는 것도, 모두 어른인 사람들의 생각이고, 기대다. 제약이 있는 만들기를 통해 다방면으로 문제 해결 방법을 고민해 보는 게 작은손에게 유의미한 경험이 될 거라는 것 역시 무인도 표류를 걱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어른의 기우에서 나온 바람이고.
그러니,
맞다.
이것은 작은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일이며, 모야가 자유로운 만들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선언을 위반하는 일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만족스러운 반론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해보기로 했다.
호랑과 까나리, 상호까지 무인도에서의 삶을 걱정했던 것은 아니고, 각자 글루건과 접착제에 대한 문제의식(심오했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끝이 한 군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모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벌써 출판된 지 10년 차가 되는 『손의 모험』에서 우리는 ‘만들기’가 소비 지향 사회에 저항하고, 삶의 주체성을 되찾을 방법이라고 썼다. 그렇다면 - 만들기가 삶으로 이어지는 행위이고, 모야에서의 만들기 역시 그렇다면 - 가끔은 그 모험에 시련을 더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사랑도, 우정도. 학업도, 인생도. 모두 모험이니, 어차피 우리는 그 속에서 몇 번이고 표류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예측이 아니다. 예지다. 그리고 그런 때 손을 움직이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살아남는 데에 도움이 된다. 경험적으로 그렇다. 또한 글루건 없이 텐트를 만들어 본 사람은 배도 만들 수 있다. 그 방법이 어떤 건 투박하고, 어떤 건 복잡하고, 어떤 건 터무니없이 어렵겠지만, 괜찮다. 그걸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가 시작될 수 있다. 경험적으로 그렇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릴리쿰이 북풍이 되어 모야에서 글루건을 불어 없애보기로 했다.
이상이 <만들기의 반대말>을 시작하는 나의 변명이다.
그럼 이제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자.
무인도의 삶을 걱정하는 물고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