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난다는 것
어쩌면 여행은 그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보다 떠나기 전 기대와 상상 속에서 더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와 나의 여행 메이트 그래서씨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기 6개월 전, 라오스에 가기로 결정했다. TV 속에서 처음 보게 된 그곳의 느낌은 어떤 꾸밈과 가식도 없는 자연 그 자체의 모습이었고, 물놀이를 신나게 즐기기에 좋아 보였다. 프로그램 이름이 그래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라오스 여행은 왠지 청춘일 때 해야 할 것처럼 보였다. '청춘'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나이가 이미 지나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우리는 한 해를 또 지나 더 높은 숫자의 나이를 갖게 되기 전에 라오스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비행기를 예약하기도 전에 여행책을 샀다. 한 10개월 전쯤, 라오스에 가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때는 라오스가 어떤 곳인지 살짝 들여다만 보고, 4개월 전쯤엔 책을 면밀히 뜯어보며 일주일의 시간을 그곳에서 어떻게 보내야 할지 하얀 종이에 또박또박한 글씨로 적어 내려갔다. 어쩌면 나는, 이때 떠날 곳에 대한 가장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대한 스케치를 마치고 나서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3개월쯤 전엔 라오스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우기를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행복해 보였던 TV 속 그들의 모습 때문에, 하루 종일 비가 내려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여름 시즌에 떠나는 여행이 가을이나 겨울에 떠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에. (직장인의 비애) 우리는 가장 저렴한 비행기 티켓으로 예약을 마쳤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나를 그곳으로 보내 줄 수 있다면, 항공사가 어딘지 서비스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는 곳과 먹는 것에 더 투자하기 위해 짧은 시간 동안의 불편함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집을 떠나 머물게 될 곳의 선택. 책을 보며 여행을 계획할 때만큼 여행지에서 머물 곳을 고르는 일도 매우 신나는 일이다. 잠들기 전,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빛나는 눈동자로 앱을 샅샅이 뒤졌다. 크로아티아 여행 이후, 호텔보단 집(아니면, 집같이 꾸며진 곳)을 빌리는 것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지만, 라오스에서는 호텔에서 머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호텔 앱을 열심히 뒤져도 방비엥(라오스의 첫 번째 여행지)에서는 마음에 드는 호텔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누군가의 여행 기록에서 보게 된 사진 한 장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한없이 펼쳐진 초록색 들판. 그 푸르름을 마주하고 앉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책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곳에 앉아있는 내 모습, 거기에서 느끼게 될 나의 감정이 그려졌다. 실은 그곳에서 느끼지도 않을 감정을 회사 책상에 앉아 다른 사람이 남긴 여행기록 속 사진을 보며 느끼고 있었다.
그다음의 여행지인 루앙프라방에는 방비엥과 다르게 호화스러워 보이는 호텔들이 많았지만, 내 마음에 들어오는 곳은 딱 두 군데뿐이었다. 하나는 CNN에서 '죽기 전에 가봐야 할 호텔'로 선정했다는 꽤 부담스러운 가격의 호텔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라이빗한 뒤뜰이 있는 럭셔리한 호텔이었다. 나와 그래서씨는 선택을 위한 논리적 판단 과정과 극심한 내면적 갈등을 경험하지 않고, 또 욕심과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며, 두 곳 모두에서 머물기로 했다. 루앙프라방에서 머무는 3일 동안 같은 곳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여행 준비라 할 것은 짐을 싸는 일, 그리고 짐을 싸기 전에 여행에서 필요할 물품을 구입하는 일이다. 수영복이 한 5개쯤은 되는 것 같은데, 자주 가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매일매일 업데이트되는 수영복들을 한 달 내내 구경했다. 수영복을 사려고 간 것은 아니었지만, 백화점에 갔다가 수영복을 샀다. 래시가드와 팬츠도 있었지만 2주일 전쯤 있는 것들을 또 샀다. 그전에 샀던 건 짧은 길이의 티셔츠 같은 래시가드라면, 새로 구입한 것은 집업 타입이었다. 집업이 더 편하고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모든 것을 갖췄지만 쇼핑몰을 매일 방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 여행 가서 입을 롱 원피스도 한 3개쯤 샀다. (이 중 하나는 가져가지도 않았다.)
라오스로 떠나기 얼마 전쯤엔 서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작년 휴가지에 가져가려고 했으나 짐이 너무 많아서 못 가져갔던 책을 이번에 가져갈까 했는데, 이 책을 보자마자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날이 코 앞에 다가왔을 땐, 그 날 그 날 어떤 옷을 입을지 생각했다.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장소에서 내가 하게 될 것을 생각하며 잘 어울릴만한 옷들을 떠올렸고, 그 옷을 입고 그곳에 있는 나를 상상했다.
떠나기 일주일쯤 전엔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손톱과 발톱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내가 직접 그린 것은 아니다.) 발톱에는 새로 산 수영복과 잘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프랑스 국기를 그리게 되었고(라오스를 프랑스가 점령했던 적이 있어 의도치 않게 내 발톱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프랑스 국기를 엄지발톱에 그리게 되며 불현듯 떠올랐던 라오스 국기 디자인을 일주일 뒤 다른 네일 아티스트에게 설명했다. (꽤 여러 번 설명해야 했다.) 생동감 있어진 내 손톱을 보며, 내가 생각해낸 디자인에 감탄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싫어하고 소질도 없지만,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일에는 재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디에도 없는 디자인이라 더 뿌듯했다. '계산을 할 때마다 점원이 내 손톱을 보며 예쁘다 말하겠지?'란 즐거운 상상과 함께. 실제로 라오스에 있는 동안 그 누구도 내 손톱을 쳐다본 적도 없고 보고 말을 걸어온 사람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호텔 직원이 내 발톱을 보고 '발톱에 프랑스가 있네?'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내 발톱을 보고 누군가가 예쁘다 말해주길 바란 적은 없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 중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떠나기 전 날, 한참을 침대와 한 몸으로 누워 짐을 싸야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서야 짐을 싸기 시작했다. 생각해놓았던 옷들을 한 번 입어보고, 다림질을 하고(여행지에서 입을 옷들 중엔 일상에서 입기엔 망설여지는 것들이 있어 보통 옷장 깊숙이 숨겨져 있다.), 여행 가방 속에서 심하게 구겨지지 않도록 정성스레 접어 담았다. 이 작업을 마치고 나니 나는 이미 지쳐있었다. 그 밖의 준비물을 챙기다가 나머지는 내일로 미루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떠나기 전 날, 짐을 완벽하게 싸지 않고 어둠 속에 누워있다는 사실에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스마트폰의 메모장을 열어 챙겨야 할 모든 준비물들을 빠짐없이 기록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적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다.
떠나는 당일에는 일어나자마자 짐을 싸고 나갈 채비를 했다. 떠나는 날에도 평소보다는 조금 더 예뻤으면 했지만, 짐을 싸느라 화장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고, 나는 어제 침대와 한 몸으로 왜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평소보다 초췌한 얼굴로 완벽하게 준비된 여행 가방을 끌고 집을 나섰다.
우리 집이 마음에 드는 것 중 한 가지는 집에서 5분 거리에 공항버스 정류장이 있다는 것이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며, 어디론가 걸어가며 이렇게 설레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방콕으로 떠나던 날, 같은 곳으로 향하며 이 감정을 똑같이 느꼈었다. 그때는 너무 설렌 나머지 버스가 도착하기 40분쯤 전에 정류장에 도착해 한참을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10분 전에 도착해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사실, 짐을 싸느라 40분 전에 도착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어린 왕자를 만나기 한 시간 전부터 행복해진다는 여우의 말이 인생에서 가장 공감되는 순간이었다. 만약, 여우가 어린 왕자와 다른 별로 여행을 가기로 하고 그를 기다렸다면, 여우도 나처럼 6개월 전쯤부터 행복했겠지. 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여우는 점점 더 행복해지고, 당일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할 거야.
공항에서 먼저 도착해있던 친구를 만났다. 10대 소녀들처럼 깔깔대며 체크인을 하러 가는 우리 모습에 공항 직원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항 검색대를 통과한 후 한껏 흥분된 상태로 햄버거집으로 향했다. 이상하게 버거킹 햄버거는 공항에서 제일 맛있다. 이건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다.
마침내 비행기 안. 평소에 셀카를 잘 찍지 않는데, 특별할 것 없는 비행기 안에서 셀카를 한 스무 장쯤 찍었다. 얼굴은 늘 똑같은데, 오히려 화장도 덜 했는데. 그리고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처럼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담았다. 하늘은 늘 다른 모습이기도 하지만,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므로. 핸드폰에 하늘과 구름을 충분히 담고 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꺼냈다. 라오스에 가기 전 먼저 그곳을 다녀온 그의 여행 이야기가 궁금했다. 라오스 여행기를 읽고 나서(10개 지역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할까 말까 고민해왔던 '탁발'을 하기로 결정했고, 조금은 불확실한 그의 대답을 읽으며 그가 라오스에서 느낀 것을 빨리 확인하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