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체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녀에게 있다.
레즈비언의 삶에서 3년이 넘은 연애는 노부부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이 세계에서는 빠르게 인연이 돌고 돈다. 까탈스러운건지, 행동력이 좋은건지.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이 생태계에서 우리는 어느덧 5년차를 향해간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반려인으로 생각하고 살지만 법적인 효력이 없으니 그저 각자의 인간성과 신뢰에 모든 걸 맡겨야 한다. 그러나 5년 간 지켜 본 그녀는 내가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배신하지 않을 것 같은 충신타입의 사람이다. 연애 초반에는 나도 남들처럼 이유 없이 관계의 끝을 생각하기도 하고, '결혼'이라던지 '언약식'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이 사람에게 확신을 가질 수 없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지켜야 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충성도를 증명해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주말부부로 살고 있다. 금요일 퇴근하고 돌아오면 같이 저녁을 먹고 보고 싶은 채널의 최신 영상을 보고, 침대 옆 소파에서 책을 읽다 늦은 밤에 잠든다. 토요일은 오전 7-8시면 눈을 뜬다. 점점 생체시계가 정확하다. 아침 잠이 없는 내가 먼저 밖으로 나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면 '아내'로 불리우는 자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온다. 부시시한 머리를 동그랗게 쓰다듬고 한 번 꼬옥 끌어안는다. 따뜻한 온기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녀를 화장실 방향으로 보낸 후 양치를 시킨다. 정신을 차린 아내와 함께 함께 아침을 먹으며 오늘 뭐 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눈다. 대게 그녀는 집에 있고 싶어하고 나는 나가고 싶어한다. 한참의 이야기 끝에 두 사람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늘 이런 방향이지만 이 것이 그녀가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 이다.
다소 이른 아침이지만 문이 열린 카페를 찾아 하염없이 걷기도 하고, 사거리에서 가위바위보를 하며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는 이상한 산책을 하기도 한다. 지나가던 고양이를 보면 좋아하고,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계절을 말하고, 그러다 갑자기 인형뽑기에서 2천원을 쓰기도 허망해 하기도 하고, 터덜터덜 걷지말라는 핀잔을 듣다가 냅다 달리기 경주를 하기도 한다. 아내와 놀 때 가장 즐겁다. 우리는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일상의 고민을 이야기하며, 실 없는 농담에 웃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다시 태어난다. 지난 주의 나도 내가 아니고, 오늘의 나도 지난 주의 내가 아니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지금'을 공유한다. 늘 서로가 궁금하고, 새롭게 느껴진다. 부시시한 머리도 지난 주 보다 자라있고 지난 주에 난 뾰루지도 오늘은 가라앉고 없다. 주말부부로 사는 삶은 늘 모든 걸 새롭게 한다. 늘 궁금하고 늘 보고싶다.
지난 주에는 밸런스 게임을 했는데 상상만하다 울어버렸다. 그 때 문득 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없으면 안되는 삶'이라는 선 안에 들어와버렸다랄까. 행복하고 즐거우면 두 배로 기쁘고, 망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절반만 망했다고 느껴지는 내 삶의 정체성은 이제 내가 '아내' 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있다. 40대가 더 가까워지는 지점에서 확신은 약속 그 이상이다. 내 삶의 모든 건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그녀는 유일하게 바뀌지 않는 내 삶의 단 하나 일 것이다.
따뜻한 온기를 품고 좋은 냄새가 나는 두 사람이 머무는 우리집이 있다.
Ps. 배려하고 양보 할 수만 있다면, 누구와도 살 수 있습니다.
비언여러분들. 부디 상호 자비를 베풀고 평안을 찾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