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사람은 잊지 못하는 법.

by sheL

그 때가 11월쯤이었나보다. 때 이른 추위가 찾아와 미처 겨울 옷을 꺼내지 못했던 나는 얇은 니트 한 장을 입고 언니를 만나러 갔다. 시외버스를 타고 또 시내버스로 갈아 타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오른쪽에서 세게 불어 온 바람 탓에 들고 있던 교통카드를 놓쳐버렸다. 사람들이 내리고 있는 상황이라 한 발 떨어져 누가 주워가지 않도록 바닥을 쳐다봤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하고 도로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버스 카드를 주워들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버스카드의 아랫면에 흙과 끈적이는 뭔가가 묻어있었다. 으- 라는 모양의 얼굴을 하고선 손가락으로 버스카드의 끄트머리를 잡은 채 뒤를 돌았다. 언니가 서 있었다. 본의 아니게 으- 라는 모양의 얼굴로 언니를 마주했다. 상황을 설명할 새도 없이 언니가 까르르 웃었다. 설명을 하려다 만 입술을 다물고 나도 함께 와하하 웃었다. 첫 데이트는 그렇게 조금은 엉뚱하고 이상하게 시작되었다.



언니 잘지내?

난 이제 언니가 그립지 않아. 그치만 내 인생을 떠올릴 때 언니를 빼 놓을 순 없을거야. 언니는 내 안의 영혼을 발견하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또 자유롭게 해줬으니까.


언니를 처음 봤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 어떤 사진보다 선명하고 그 어떤 영상 보다 충격적이었으니까. 이렇게나 하얗고 맑은 사람이 세상에 있었다니. 강의실로 들어오던 까만 긴 머리에 새하얀 얼굴을 하고 있던 언니를 처음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해버렸어. 단순히 '예쁘고 멋있다.' 라는 생각이었는데 언니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멀리서 보이면 설레고, 가까이 앉아있을 때면 언니의 향수 냄새가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어. 그건 지금 생각해도 사랑이었을거야. 사랑이 아니라면 우정일텐데 우정이라고 하기엔 언니는 너무나도 나를 설레게 했어. 언니를 하루라도 못 본 날은 깊은 한숨이 나오고 언니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던 날은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쉽게 잠에 들지 못했으니까.


내가 용기내서 친해지고 싶다고 말했던 기숙사 원형 테이블을 기억해? 언니는 그런 내 말에 '고마워' 라고 말했어. 다른 건 필요없었어 그냥 그 말 한마디로도 좋았어. 그 땐 나도 날 잘 몰랐고 언니에게 그런 마음을 갖는 다는 것부터 죄책감이 들었으니까. 그치만 왠지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어. 연락도 자주하고, 시간 내서 저녁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느긋하게 산책하며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그렇게 여름이 끝나가는 순간을 함께 보냈어. 10월 중순쯤이었을거야. 날이 약간 추워지려고 하는 어느 저녁에 평소처럼 밥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언니가 먼저 '우리 사이는 뭐인 것 같아?' 라고 내게 물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이상한 말을 얼버무렸던 것 같아. 그리고 걸음을 멈춘 언니가 내 앞에 선 채 내 눈을 바라봤고 난 그런 언니를 보며 좋아한다고 고백했어. 언니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가던길을 걸어갔어. 그 때 봤던 언니의 뒷 모습이 아직도 가끔 생각나. 언니는 어떤 표정을 하며 걷고 있었을까?


그 날 밤 기숙사에서 나는 끝나지 않는 편지를 썼어. 미안하다는 사과였던 것 같아. 언니를 좋아한 죄책감과 우리 사이를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울며 수 십장의 편지를 고쳐썼어. 이제 난 언니와 완전히 멀어졌다는 생각에 눈물로 편지지가 젖어들려고 할 때, 한 통의 문자를 받았어.

"나도 너 좋아해."

문장을 고쳐쓰며 너무 많은 단어를 떠올려버린 탓에 머리가 멈춰버린 건지 아니면 누군가 그 현장에 있었어서 장난을 친 건지 몇 초의 시간동안 세상이 뒤틀리는 경험이 했어. 평행세계인걸까. 거짓말일까. 뭘까.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진정이 안되던데 그 문자를 보낸 언니는 어땠을까. 답장 할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고치다 보니 1시간이나 지나서 답장을 했었어.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고맙다고 했던 것 같아. 정말 고마웠거든.


다음 날 강의실에서 마주한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내 등을 톡- 치며 내 뒤에 앉았어. 그리고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날씨 이야기도 하고 과제 이야기도 나누며 여느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을 보냈어. 언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나는 괜히 다른 친구들과만 시선을 맞췄고 언니는 그런 나에게 보란 듯 더 말을 걸었어. 언니의 눈을 바라보자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자 난 과제를 핑계로 몸을 돌렸고 언니는 그런 내 등에 '바보' 라고 크게 썼어. 부끄럽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그 때의 나는 참 솔직하고 어렸네.


언니, 난 언니와 연애를 하는 동안 참 행복했어. 가끔 언니의 주변 사람 때문에 슬퍼지기도 했지만 언니는 참 따뜻하게 날 감싸줬어. 언니의 손은 참 부드러웠고 언니의 품에선 향수 냄새가 났어. 큰 키도, 까맣고 숱이 많던 긴 머리도, 창백할 정도로 하얗던 피부도, 시덥잖은 농담에 살짝 인상을 쓰며 까르르 웃던 표정도, 길고 예쁘던 손가락도, 동그랗게 써내려가던 글씨체도 다 좋았어. 언니와 헤어지고 10년 동안 내 이상형은 언니같은 사람이었어. 하얀 얼굴에 키가 크고, 마른 몸에 까만 머리를 하고 있고, 웃는 모습이 아이처럼 해 맑던 사람.


언니, 그 시절에 나는 내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어. 남자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 여겼는데 내가 좋아한 남자는 나에게 있어 멋진 존재일 뿐이지 심장이 뛰는 존재는 아니었거든. 짝사랑이라 말하던 오빠를 생각해도 심장이 뛰지 않았기에 이런 게 사랑이라면 사랑인가보다. 라고 받아들였는데 언니를 만나고 내 심장은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게 뛰었어. 그래, 언니 덕분에 눈을 뜨게 된 거야. 나도 몰랐던 나의 정체성을 언니가 열어준 거야!

그 느낌은 살면서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어. 단 한 번도.


언니,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와 사랑을 알려줬지만 갑자기 저 멀리 도망쳐버려서 미안해.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고 우리 가족이 알까봐 두려웠고 친구들이 날 멀리할까봐 겁이났어. 학교를 휴학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소문이 나면 내가 사랑하는 이 일을 직업으로 가질 수 없을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며칠을 두려움과 걱정에 떨었어.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는 언니가 있었음에도 난 유한한 곳으로 가야만 했어. 내가 가야할 곳은 언니의 품이 아니라 학교 동기들, 내가 배우는 것들, 가족들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무 설명도 없이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짐을 고했던 날, 펑펑 우는 나를보며 언니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어. 우연히 들은 사랑해서 보낸다는 노래가사를 들으며 언니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알아챌 수 있었어. 너무나도 미숙하고 멍청하게 언니를 떠나보냈어.


언니, 난 너무 늦게 깨달았어. 언니를 만나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많은 게 지나가버린 이후였어. 언니에게 다시 연락을 할 수도 없었고, 언니의 소식을 아는 친구들에게 언니에 대해서 물을 염치도 없었어. 언니를 떠나보냈던 21살의 어린 나에게 돌아가 언니를 놓치 말라고, 꼭 붙잡고 있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 뿐이었어. 후회와 눈물이 가득했던 몇 년을 보냈어.


언니, 20년도 기억 나? 모든 게 우연이었지만 사실 언니가 보고 싶어서 우연을 가장해서 언니를 만나러 갔었어. 언니는 신기하다는 웃음을 지었지만 우리 사이에 우연이 없다는 거 언니는 이미 알고 있었지? 10년 전에 언니도 내가 친해지고 싶다고 말했던 그 날, 이미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 사이에 우연같은 거 없다는 거 언니는 이미 알았겠지만 우연을 가장한 척 호주까지 찾아간 나를 반겨줬어. 언니와 자주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호주에서의 며칠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줬어. 그리고 깨달았어. 내가 사랑했던 어린 시절의 언니는 이제 없구나.. 긴 이별의 끝에 이렇게나 짧은 작별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니. 믿을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어. 매일 가던 강가의 카페에 앉아 며칠을 울기만 했어. 그 때 흘린 눈물 덕분에 언니를 완전히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 언니를 떠올릴 때면 온통 후회 뿐이었는데 이젠 후회 같은 건 안해. 어쩌면 모든 건 필연이었고 나에게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신이 잠시 머물다 간 것처럼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람.



..

언니를 만난 게 벌써 14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어. 몇 해 전, 난 평생을 약속한 인연을 만났어. 그녀는 언니와는 정반대지만 난 그 애가 참 좋아. 다정하고 따뜻하고 마음씨가 고와. 아주 오래 전 언니가 내 심장을 깨워 준 덕분에 이 애를 만날 수 있었어. 고마워. 앞으로 우리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천천히 웃으며 걸어줘. 나도 그렇게 살아나갈게. 이젠 사람들이 시선도 두렵지 않아. 가족이 알면 좋을 것 같다고도 느껴져. 이젠 숨기고 싶지 않고 숨기지도 않을 거거든. 내 친구들은 언니를 모르지만 이 애를 만나게 해 준 것에 대해 모두 고마움을 느껴. 언니는 점점 잊어버리겠지만 언니가 줬던 어떤 깨달음들은 오래 오래 마음에 남을 거야.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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