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일기 82호.
# 2월 20일 목요일.
한동안 품절이었다가 다시 풀린 동네서점 전용 레이먼드 카버 단편집이, 이제 보니 가격이 2천원 더 올랐다. 20%나 인상됐다는 것을, 재입고 후 수 권을 팔고 나서야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아내가 먼저 발견했다. 다른 책들은 어떤지 전수 조사할 수는 없으니 재입고할 때 팔 때마다 확인할 수밖에.
그렇게 스마트스토어로 구매했던 고객 중 한 명이 별점 3개의 리뷰를 남겼다. 좋은 말만 적고 3개를 주었으니, 나머지 2개에 어떤 유감이 담겼는지, 무얼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알아야 고칠 텐데. 가격에 놀란 모양이다.
# 3월 9일 월요일.
머리를 잘랐다. 봄맞이 삼아 짧게 자르기로 한다. 낡은 마음들을 함께 잘라버리자는 각오를 다지며. 미리 저장해 간 머리 사진을 보여준다. 안 어울린다는 건지 그렇게 못 자르겠다는 건지, 디자이너가 그가 가진 다른 사진을 보여준다. 처음 가는 미용실이다. 정성스러운 바리캉질, 한 번에 자르지 않고 길이를 점점 짧게 바꿔가며 자른다. 쑹덩쑹덩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보니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정말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다.
오전 일찍 예약을 했고 미용실에는 디자이너와 둘만 있다. 한창 자르는 중에 다른 남자 손님이 들어온다. 그 뒤로 들어온 남자는 원장인 것 같다. 단골인지 앉자마자 둘의 수다가 시작된다. 바리캉 소리만 나지막이 울리는 우리 쪽은 지워진 듯하다. 그 손님도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다. 듣고 싶지 않지만 들린다. 자신의 월급을 정해놓고 나머지는 사업자 통장에 그대로 넣어둔다든지 일과 삶을 분리한다든지, 자신만의 사업 원칙과 성과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들어보니 나이는 나보다 열 살 어린것 같은데 경험치는 열 살 많은 듯하다. 원장과 나는 한마음으로 부러워한다. 내 일에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부분이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생각보다 더 짧게 잘렸다. 내가 가져간 사진을 우겼어야 했는데. 뭐 머리는 다시 자라니까. 계절은 다시 돌아오고, 고민과 걱정들도 함께 쑥쑥 자랄 테지.
6인치 미러를 바로 만드는 것보다, 4인치 미러를 만든 다음 6인치 미러를 만드는 것이 더 빠르다.
It is faster to make a 4-inch mirror and then a 6-inch mirror than it is to make a 6-inch mirror.
—Allyn J. Thompson, Making your own telescope, 1947
# 3월 14일 토요일
장강명 작가와 부부이자 독서모임 플랫폼 '그믐'을 운영하는 김새섬 대표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것을 며칠 전 기사를 통해 알았다. 죽음이 코앞인데 여전히 책을 읽고, 독서모임을 운영하고, 전보다 더 높은 "밀도와 속도"로 살고 있었다. "삶을 압축해서". 그는 떠나는 날까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책 읽는 즐거움, 함께 읽는 힘을 전파하고 싶"다는 계획을 밝힌다. 죽음을 가까이 둔 포부. 죽음이 반갑지는 않지만,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억울하지는 않다고, 책을 많이 읽은 게 상황을 객관화하여 보는 데 도움이 됐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남편인 장강명 작가가 시한부인 걸 내가 기사를 잘못 읽었나 싶을 정도의 태연함이다. 책을 읽으면 삶과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는 개념이었지만 감히 그와 견줄 수 있겠는가. 읽기와 쓰기가,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곱씹어본다.
문학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삶이라는 게 죽어가는 것이고 죽는다는 건 살아가는 것이라는 게 인생의 진리라고 계속해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성에 압도되어 비틀거리면서도 그에 맞서는 인물들과, 그들을 내세워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작가들, 그런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강한 열망과 욕망으로 살았다. 일, 사랑, 부, 명예, 지식에 대한 허기와 탐욕으로. 생명이란 그저 소유와 소비에 대한 갈망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라는 듯이. 지금도 앎이라는 어떤 간절한 마음으로 사는지 모른다. 그렇게 불안정한 삶의 구렁텅이에서 방황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놀라지 말라고 문학이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의미는 잊힐 것이고, 얼굴들은 지워지고, 반짝이는 순간들은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부단히 바스러져 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끝내 무無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