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믿어왔던 것들을 끝까지 의심하고

책방일기 81호.

by 그럼

# 1월 22일 목요일

매서운 추위가 거리를 꽁꽁 얼리고 있다. 이 궂은날에도 밖으로 나서는, 모험을 두려워 않는 신기한 사람들. 오랜만에 책방을 찾은 전병근 선생님도 그런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이 책방 안부가 먼저다. 괜히 주변 걱정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와 인연이 있는 B책방도, 이름이 알려진 유명 책방임에도, 모임 대관 등을 통해 근근이 책방을 꾸려간다고 한다. 그가 응원차 건넨 말이다. 그러면서 책을 써보라고 권한다. 순문학에 대한 막연한 소망은 있지만 주제넘은 야심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 최근 책을 낸 B책방의 책방지기처럼 책방 이야기를 써보라는 것이었다. 책방 홍보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 공간에만 담긴 특별한 이야기가 있겠다고 하셨지만, 이미 많이 나온 책방 책들 위로 내가 무슨 남다름을 얹을 수 있을까, 나무 낭비다. 책방 에세이는 책방지기들만 읽는 듯하다.



# 1월 26일 월요일

'피터 래빗'은 최초로 상표 등록된 문학 캐릭터다. 한 세기 전, 베아트릭스 포터는 상표권을 위해 피터 래빗 인형까지 직접 만들었다. 책방 오픈 전, 나도 책방 이름으로 상표 등록을 했었다. 가게 문을 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은 아니다. 피터 래빗처럼 유명세를 탈 일도,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렇지만 내 것이라는 느낌,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들까지 내 손으로 빚은 것이라는 감각을 갖고 싶었다.

상표권 출원 과정은 변리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어렵지 않다. 혼자서도 할 수 있다. 상품 별로, 서비스 분류 별로 등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돈이 들뿐이다. 그래서 나 같은 개인사업자는 필요한 분야에만 신청을 한다. 서적과 카페, 출판 등으로만 신청해도 금액이 상당했다. 출원만이다, 등록 비용은 별개다.

처음에는 'remembooks리멤북스'라는 이름으로 신청했다. 그때는 'remem리멤'이라는 이름이 흔하게 느껴졌고 거절 통보를 받을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야 'remem리멤'으로도 신청해 출원에만 돈을 두 배로 쓰게 된다.

분당우체국에 갔다. 특허청에서 온 미수령 등기 우편물이 있었다. 출원 후 등록까지 1년여가 걸리니 잊고 있을 때쯤 연락이 온다. '리멤북스'로 출원한 게 재작년 봄이고, 등록이 작년 여름이다. '리멤북스'의 등록 여부를 고심하다가(비용 때문에), 심사 중인 '리멤'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니 등록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리멤'에 대한 심사 결과라고 예상했으나, 중간 통보물이란 게 도착해 있었다. 여전히 심사 중이라는 내용과 과다 청구에 대한 주의 안내문이다. 아마도 비슷한 이름으로 왜 또 신청했냐는 훈계일 것이다. 심사관 시간 낭비, 내 시간 낭비, 돈 낭비. 선택지 앞에서 우물쭈물하면 나중에 거대한 파도가 되어 들이닥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책방에 들렀다. 그간 모인 우유팩을 챙겨 주민센터에 갔다. 휴지 교환하는 책상 주변에 직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리멤 사장님'이라고 바로 알아본다. 대부분 주변 카페들이 우유팩을 모아 오는데, 이렇게 부지런한 카페들을 돌아가며 방문하자는 귀여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하면서도 밖에서 태도를 바르게 하고 다녀야겠다는 경각심이 일었다.



# 2월 5일 목요일

평일 점심시간에는 식후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손님들이 많아 다른 때 보다 말소리가 제법 공간을 채우는 편이다. 책을 읽으러 온 사람인지, 커피를 마시러 온 사람인지 이제는 대충 알아볼 수 있지만 그래도 열람용 도서에 관해 열심히 안내를 한다. 그저 호기심으로 판매용 책을 가져다 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읽지 않고 장식용 물건처럼 옆에 둔다.

중년의 남녀 커플이 들어왔다. 다른 주문들로 바쁘기도 했고, 대화를 나누러 온 모양새라 안내를 넘어갔다. 하지만 한 명이 호기심이 많았다. 열람용 도서 안내를 드린다. 점심시간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뒷정리를 하는데 그분이 읽었던 책 자리가 여전히 비어있다. 책을 본 후 제자리가 아닌 여기저기 아무 데나 꽂는 손님들도 있기 때문에, 책장 전체를 찬찬히 훑었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설마 하며 CCTV를 돌려봤다. 문 옆 창가자리에 앉은 그 커플은 떠나기 전까지 자리에서 일어난 적이 없다. 그대로 들고나간 것이다.

어빈 웰시의 『트레인스포팅』에서 렌턴과 스퍼드는 책을 훔치다 잡힌다. 판사 앞에서 스퍼드는 마약을 사기 위해 책을 팔았다고 솔직히 인정하는데, 렌턴은 읽기 위해 책을 훔쳤다고 말한다. 그가 키르케고르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판사는 설명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주체성과 진리에 관해, 자신이 보기에 부르주아적이면서 해방적이라는 실존주의 철학에 관해 늘어놓는 렌턴의 달변을 듣고는 무죄를 선고한다. 스퍼드는 감옥에 간다. 『서점 일기』에서 숀 비텔은 이 부분을 인용하며, 책을 훔치는 일은 "그 자체가 교화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가 더 큰 가치를 지닌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왠지 도덕적으로 비난을 덜 받아도 될 만한 일처럼" 여겨지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책방 주인은 관대해지지 않는다. 심란하기만 하다. 책을 들고 오지 않았는데 그만한 크기의 물건을 실수로 들고나갈 수도 있었을까?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이런 걸로도 수사를 할까? 의심부터 하다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뒤 전화가 왔다. 함께 왔던 사람이다. 급하게 나오느라 책을 가지고 나왔다고 내일 돌려주겠다고 한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인류애 회복.



# 2월 6일 금요일

그렇지만 여전히 속이 타들어 간다. 그들이 정말 돌려줄지 알 수 없다. 깜빡했다고 또 다음 날 돌려준다고 하면 어쩔 텐가. 의심이 마음을 갉아먹는다. 위태로운 인류애. 마음이 작은 나는 장사 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이럴 때 깨닫는다.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는 사이 그가 왔다. 틈사이 생글생글한 표정으로 책을 건네고 사라진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됐다
누구 앞에서든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애써 웃지 않는다

네가 떠오르지 않는 아침과
마음껏 떠들고
마음껏 마시는 밤마다

나는 내가 믿어왔던 것들을 끝까지 의심하고
그런 나를 믿는다

—이새해「나를 보는 네 표정에는 기쁨이 없다」


거래를 위해 처음으로 계산서 발행 요청을 받았다. 그동안은 지출 증빙용 현금영수증으로 충분했고 포스기로 간단히 발급할 수 있었다. 계산서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계산서 발행용 인증서(유료)가 필요하다. 그렇게 고난이 시작된다.

인증서라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한데 돈까지 내라니. 모바일 손택스에서 발행하면 생체 인증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공급자 정보, 거래처 정보 입력. 일자, 품목, 단가, 공급가액 입력. 발급하기. 500만원 이상은 인증서가 필요하다는 경고창이 뜬다. 왜 처음부터 알려주지 않는 걸까. 어쩔 수 없이 인증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그런데 은행 앱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계산서 발행용 인증서 항목이 없다. S은행, K은행, W은행... 모두 마찬가지다. UI들을 무척이나 정교하게 만들어놨으니 내가 못 찾았을 수 있다. 하지만 정답은 기업용 은행 앱을 설치해야 한다. 설치한다. 인증서 발급을 위해 모바일 OTP가 필요하다. OTP를 발급받기 위한 지난한 과정, 개인정보를 몇 번째 입력하고 있는 건지, 중간에 흘리고 샜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은행 직원과 영상통화도 한다(내 얼굴만 보인다). 사람 목소리가 들리니 반갑다. 드디어 인증서 발급.

홈택스로 들어간다. 발급하기. 선택하신 인증서와 입력한 신원확인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단다. 다른 설명도 없다. 짧은 문장을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해석이 되지 않는다. 힘겹게 발급받은 인증서인데 그게 내가 아니었다는 말일까. 전자인증센터인지 한국전자인증인지에서 인증을 하면 해결된다는 정보를 찾았다. 인증을 위한 인증이 필요하다! 사이트에 접속하니 보안프로그램 설치 목록으로 안내한다. 뒷목이 뻗뻗해져온다. 맥북을 닫고 윈도우가 설치된 노트북을 꺼낸다. 설치하고 재부팅하는 지난한 과정, 내가 무엇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 잠시 상기한다. 그리고 또다시 마지막에야 나타난 경고창. 아뿔싸 이건 금융인증서가 아니라 공동인증서에만 적용되는 과정이었다. 나는 금융인증서를 발급받았더랬다. 아무 성취도 보람도 없이 윈도우 노트북을 닫고 다시 홈택스로 돌아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공동인증서를 발급받을 것인가, (내 마음대로) 이대로 포기할 것인가. 고투 끝에 홈택스에 사업자로 새로 회원가입을 하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아이디는 달라야 한다). 그동안 개인용 계정으로 로그인해서 사업자와 잘 연동해 주었으면서, 왜 다시 가입해야하는지 의문이지만, 여기까지 왔으면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드디어 계산서를 발행한다. 담당자에게 따로 이메일이라도 보내고 싶다. 사연이 담긴 오브제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내가 가게에 있다는 걸 깨닫곤 카운터 너머로 내 분노의 외침이 흘러 나가진 않았을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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