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일기 80호.
# 12월 18일 목요일
오랜 단골 J님이 이사를 간다는 슬픈 소식을 전했다. 매주 책을 사는 고마운 손님이다. 그곳에 가서도 온라인 주문을 하겠다고 오히려 미안해하는 그를 보니, 그동안 카운터 너머로 무언가 커다란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느꼈다.
오랫동안 독서모임에 함께 한 S님도 곧 3년간 해외 파견을 나간다고 했다. 무척이나 들뜬 모습이었다.
처음 봤을 때의 모습들이 신기하게 기억이 난다. 어느 순간에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삶들. 그들이 당장 떠나는 것은 아니니 작별 인사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가, 진심을 담은 애정 어린 작별 인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난 항상 남겨두고 떠나는 사람이었는데. 군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부터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공부하겠다고 떠나고, 돈이라는 걸 벌어보겠다고 떠나고, 다시 내 일을 하고 싶다고 떠나고. 그 수많은 사람들과 어떻게 작별했었는지 모르겠다. 어쭙잖은 모험심의 흥분과 잘 떠나는 일을 착각했을까?
새로운 삶으로 떠나는 그들이야, 앞으로 더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걸어갈 터이니, 그들이 남겨둔 이 정체 모를 애틋함들을 잘 그러모았다가 언젠가 돌려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넓은 세상으로 가겠어. 거기서는 어떤 시간도 지루하지 않을 거야. 나는 놀라운 일들을 충분히 보겠어.' 그리하여 그는 부모와 작별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갔다. 길이 그를 어디로 인도하든 그에게는 매한가지였다.
—그림 형제 「겁나는 게 없는 왕자」
# 2026년 1월 1일 목요일
언제 이렇게 한 해가 흘렀는지, 매년 놀란다는 게 더 놀라운 연말연초. 며칠 전 본 로버트 저메키스의 영화 '히어'에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톰 행크스가 헤어진 아내인 로빈 라이트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난 세월 아내의 말을 들어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며 사과한다. 평생 걱정만 하면서 살아서 그랬다고, 걱정만 하면 그 모든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될 줄 알았다고. 그래서 나도 매일 걱정만 하면서 사는 모양이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에도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렇게 50번 마음을 끓이면 1년이다.
은사님들에게 매년 편지를 쓴다. 간단한 연하장으로 시작했던 것이 어느새 시시콜콜 하소연을 늘어놓는 (귀찮게 할지 모를) 루틴이 되었다. 지도교수님에게는 어제 전화가 왔다. 사실 잘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책방한다고 나도는 제자에게 실망하셨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편지를 쓰기도 전에 먼저 안부를 묻는 교수님께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스스로를 부끄러워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S교수님에게서 답장이 왔다. 안식년을 보내러 미국에 가 계셨다. 내 편지를 기다린다는 다정한 인사에 마음이 뜨끈해진다.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간다는 교수님의 둘째 아이가 쓴 에세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Creativity is nurtured with inefficiency. It requires time to wander, fail, and explore without immediate results.... Without another factor to provide direction, development risks becoming a movement without meaning
창의성은 비효율 속에서 자란다. 즉각적인 보상이 없어도 방황하고, 실패하고, 탐구할 시간이 필요하다. ... 방향을 보여줄 다른 요인이 없는 계발은 의미 없는 움직임이 될 위험이 있다.
창의성 대신 어떤 다른 단어를 대입해도 들어맞을 좋은 말이다. 삶, 사랑, 일.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괴테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비틀비틀 휘청거리는 제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숙한 글을 쓸 줄 아는 아이라니. 나는 더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 1월 4일 일요일
손님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장사가 안 되는 날이 있어도 결국 채워져 균형을 이룬다는 행복회로일 수 있지만 반대일 수도 있다. 이 주 내내 괜찮았는데 막상 주말 손님이 많지 않다. 총량의 증가를 증명할 수 없다면, 만족의 총량을 줄이는 방법도.
# 1월 6일 화요일
일대 건물과 골목의 신묘한 구조와 배치가 바람을 한 곳으로 모으고 주변의 쓰레기를 정성스레 가게 앞에 가져다 놓고 있다.
H택배 기사님에게 여자친구에게 선물할 책 두 권을 추천해 줬었다. 나도 그도 그녀의 취향을 모르는 채. 오늘 택배 물건과 함께 여자친구가 대만족 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 1월 9일 금요일
얼마 전 중학생 조카가 직접 책을 주문했다. 겁도 많은 아이가 공포물을 좋아해서 게임도 그런 장르만 하더니 고른 책도 공포소설이다. 그래도 그동안의 책선물 공세가 효과가 있었는지 먼저 책을 읽겠다고 한 게 무척 기특하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책을 받으러 왔다. 그런데 조카가 요즘 글을 쓰고 있다며 직접 쓴 짧은 소설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이코패스 킬러 부자父子 이야기다. '투명드래곤' 같은 순진함이 보이지만 신선한 아이디어에 서사를 끝까지 끌고 나간 것이 예쁘다. 누구나 첫 문장은 쓸 수 있다. 마침표를 찍는 게 어렵지.
아침저녁으로 쓴다고 했다. 책방에 앉아 스마트폰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1월 15일 목요일
두바이 뭘까. 지인들에게 (조언인지 먹고 싶다는 건지) 너희도 두쫀쿠를 만들라는 연락들이 오는 것을 보니 유행도 이제 고점인 모양이다. 두바이 컬러만 봐도 현기증이 인다. 시장에 휩쓸리지 말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것이 일의 원칙 중 하나였는데, 책이 아니니 괜찮지 않냐고 어디선가 비밀스러운 속삭임이 들려온다. 성장은 언감생심, 지속과 몰락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내실을 다지느니 그런 소리 할 때냐고.
내 일을 한다는 것이 그렇다. 돈이 아니라 내 삶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유혹과 자극에 저항하면서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 지켜내며 시지프스적으로 사는 것이다. 일이라는 게 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유행의 얽매임과 부담에서 벗어났을 때 오히려 더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렇게 만들어진 내 품위라는 것에 살짝 취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아내가 이미 두쫀쿠에 대해 조사를 했었다. 카다이프와 피스타치오는 껑충 뛴 재료비는 둘째치고 이제 구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고민 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