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 위에 그린 물감처럼

책방일기 79호.

by 그럼

# 12월 3일 수요일

디바 지니 님은 책방 유일의 연예인 단골이다. 그녀는 책방 앞 화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화실을 방문할 때마다 책방에 들러 커피를 사고 책도 사간다. 친절하고 에너지 넘치는 그녀가 다녀가고 나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진다. 매번 같이 오는 일행이 있는데 오늘은 그중 한 명이 혼자 왔다. 커피를 포장하며 독립출판과 서가 책 구성에 대해 묻는다. 책을 내는 것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읽기는 쓰기로 쉽게 이어지고 읽고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책을 꿈꿀 테니까.

출간과 유통, 입고까지 아는 범위에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애썼다. 그녀는 다른 세상에 막 발을 내디딘 것처럼 신기해하고 하나하나 관심을 보였다—그 모습에 내가 더 흥분하고 있었다. 독립출판의 출간과 입고 방식에 대해서도 새로워했지만 서가의 책들을 모두 직접 골랐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일본처럼 출판사나 도매상이 책을 선정해 공급하는 배본 시스템을 상상한 것 같았다. 칭찬을 받아 뿌듯하면서도 부끄러웠다. 사기를 치는 것도 아닌데, 책들을 나 대신인 것 마냥 세워놓고,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처럼.



# 12월 9일 화요일

퇴근 후 늦은 저녁을 먹으며 노아 바움벡의 신작 〈제이 켈리〉를 보았다. 인생은 NG 없는 롱테이크 영화라는 조금은 뻔한 성장 드라마였다. 어쩐지 얄미운 주인공은 부럽기 때문이었을까?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은데 이제 삶에 대한 깨달음까지 얻다니 (조지 클루니가 아니었다면 더 얄미웠을 수도 아니 조지 클루니라서). 모두가 함께 모여 그의 지난 시간들을 회고하고 기리는 자리까지 마련된다니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삶이다.

그는 인생 재촬영을 간절히 바란다. 성공을 위해 가족을 외면하고 친구를 내버렸었다. 어디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게 그 뿐일까? 누구든 지난 삶을 찍어놓은 필름을 볼 수 있다면 눈물 꽤나 쏟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텐데. 누구의 유명한 말마따나 돌아보며 연결할 수 있을 뿐이다. 후회로 이어진 그 길이 지금으로 이끌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아이 같아진다는 것은 그렇게 다시 주위의 모든 것에 경이감을 느끼기 때문일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되거나 아무도 아닌 것이 훨씬 쉽다.
—실비아 플라스 (영화 〈제이 켈리〉 제사)


그렇지만 믿음을 갖고 오늘의 현명한 선택을 내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종일 강박적으로 앞일만 걱정하고, 잠들기 전 눈꺼풀 뒤로 재생되는 지난 일들은 어찌나 괴로울 정도로 생생한지 그렇게 뒤만 더듬거리고. 언제 어떻게 지금을 볼 수 있는지 영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 12월 13일 토요일

김민영 작가의 북토크 날이다. 보슬비가 내리는 포근한 겨울 아침, 부지런한 참석자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작가님은 책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왜 리멤인가?'라는 아이스 브레이킹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말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책방 이야기에 긴장됐다. 그는 자신의 서가를 채운 대부분의 책을 동네책방에서 구입했다고 했다. 책방지기의 취향을 확인하고, 그들의 결이 묻어나는 공간에서 책을 만나는 것을 즐겼다. 책장과 그 뒤의 사람까지 탐색하는 탐험가 같은 그는 작가이기 전에 애서가이기도, 우리 책방에는 오픈 초부터 찾아준 고마운 손님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를 더 부끄럽게 한 말은 이 책방일기를 쭉 읽으셨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독자를 만나기 위해 꺼내놓은 이야기임에도, 기분이 좋으면서도 창피했던 것이다. 그가 이곳에서 나를 찾으려 했기 때문에 더 그런지 몰랐다. 그럼에도 이렇게 독자가 나타날 땐 의심과 책망의 외로움에서 살짝 벗어나기도 한다. 직전 책방 북토크였던 박재영 작가의 책에는 좋은 선물의 세 가지 요건에 대한 인용이 있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상대에게 꼭 맞는 것을(customization), 의미를 담아서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했다. 좋은 선물을 받았다.


산초, 자네 가문이 천한 것을 떳떳이 여기게. 농부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자네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네.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일기를 내려다본다. 화면에 적힌 글자들. 하얀 바탕 위로 그려진 꾸불꾸불한 까만 선들. 머리에서 검은 실을 길게 뽑아 자수를 놓았다. 박제된 나. 줄줄 흘러나온 흐르고 흘린 흔적들. 쏟아버리지 않은 수많은 반짝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달라지기만 하고 지나가버리는, 범람하는 강물 위로 그린 물감처럼 보잘것없는 삶.



# 12월 16일 화요일

끼니를 잘 챙기지 못하는 우리 걱정에 엄마가 샌드위치와 김밥을 해오셨다. 엄마에게 드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엄마는 책방을 둘러보셨고, 굳즈 코너에 있는 기록 노트를 사시겠다며 들고 오셨다. 스스로에게 묻는 백 가지 질문을 따라 하루 하나씩 답을 적으며 자신을 사유해 보는 콘셉트의 노트이다. 엄마에게 이건 책이 아니라고 상기시켜 드렸는데도, 물건 하나 팔아주겠다고 집어오셨나 싶었다. 치유 메시지들이 담긴 가벼운 에세이를 가끔 읽으시는 엄마다. 쓰는 엄마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민음사 새해 일력을 두 개 예약해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택배를 보내겠다는 손님이 있었다. 선물을 하는 모양이었다. 희한하게도 받는 분에게서 배송 정보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문자가 왔고 또 멀리 부산까지 선물이 보내졌다. 새해는 아직 남았으니까.

며칠 전 수취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배송 사고가 있었는지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손님 전화는 여전히 무섭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번에는 반대로 주문한 분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보답으로 책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선물을 보낸 사람의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서로 알고 지내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처음 보낸 분의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는데 신기하게도 고전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정보인(달력을 찾으러 왔을 때 뵀던) '20대 여성'이라는 단서와 함께 그렇게 더듬더듬 선물할 책을 함께 골랐다. 핸드폰 너머로 머리를 맞대고 정체불명의 수취인을 그려보며 고전은 물론 소설집과 에세이, 시집까지 골고루 담았다—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책을 팔게 되어 물론 좋기도 했지만, 그보다 다정한 마음이 오가는 사이에 끼어 그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선물은 받는 쪽보다 주는 쪽이 더 큰 기쁨을 느낀다는데 무임승차한 기분이었다.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받는 사람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며 느낄지 모르는 가슴 벅찬 직업적 성취감이 이런 것일지, 조금 맛본 기분이었다. 얼른 그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그 주인공이 선물을 받았다. 벽돌책들을 포함해 다섯 부나 됐기 때문에 큰 상자에 포장해야 했다. 상자에 담긴 책을 하나씩 확인시켜 줄 때마다 그녀는 "와!" 하고 탄성을 질렀고, 뒤에는 그저 입을 벌리고 손으로 그걸 가릴 뿐이었다. 너무나 순수하게 드러내는 기쁨에 나까지 감탄해 버렸다.


자리에 앉아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둘이 어떤 사이일까 떠올리며 행주로 카운터 테이블을 닦다가 불현듯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가 아까 노트를 사면서 하셨던 무심히 흘려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번 돌아보고 싶다'라고 하신 그 말. 그 말이 갑자기 메아리치며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 것이다. 아버지 화장장에서 썼던 편지에서도 가족 누구보다 마음을 울리는 글을 썼던 엄마였다. 쓰는 사람이 따로 있나. 어느 순간 써야겠다고 느껴지면 그렇게 쓰는 것이지. 엄마가 돌아보고 싶어 한 삶은 무엇인지. 엄마도 재촬영을 바랄까? 나에게 기다려지는 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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