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생활하는 12평 남짓한 작은 평수의 오피스텔에는 단 하나의 룰만 존재한다. 매일 부딪히는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거나 큰소리가 나거나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는 일들은 모두 차단하고 평온함이 깃드는 '쉴 곳'으로 만들 것. 이 단 하나의 룰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매일 밤 9시 오늘의 안건을 들고 식탁에 앉는다.
전 씨가 재 취업에 성공하고 난 뒤 한 동안은 바빠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지 못했다. 빠듯했던 일정으로 평일이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가고 주말이 되어서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토요일 저녁 식사자리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앞에 두고 전 씨가 밥숟갈을 들며 먼저 운을 띤다.
-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결혼? 뜬금없이? 왜, 살아보니 갑자기 나랑 결혼하고 싶어 졌어?"
- "아니, 뭐. 그냥. 나 회사에 지금 인수인계해주는 팀장님 있잖아, 알고 보니까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는 거라고 하더라. "
- "아, 그래?"
-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능력도 충분한데, 결혼한다고 그만두는 게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라고."
- " 결혼 이후에도 만약 임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회사는 반기는 쪽은 아닐 테니까."
- ".. 그렇지.. 너도 혹시나 결혼을 하게 되면 일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을 크게 걱정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결혼이란 무엇인가 까지 가게 된 거지 뭐."
전 씨와 내가 동거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장거리 연애를 그만 끝내고 싶어서 이기도 했지만, 서로가 상대방에게 기댈 것을 바라지 않고, 자신만의 생활을 온전히 지켜나가는 사람들이라서 비로소 동거를 해도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동거를 시작하기 전 고려했던 부분은 전 씨와 나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를 다시 예전으로 되돌려 놓을 때가 오면, 우리가 갖춰야 할 자세들에 대해서 어떤 방법이 서로에게 덜 상처가 될까 하는 것이 었지 다른 것은 없었다.
우리 둘의 생각으로는 동거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결혼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행히 전 씨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우리는 어려움 없이 동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같이 살기 전에도 우리 둘 사이에는 결혼이 언급된 적이 없었고, 후에도 결혼 이야기는 오고 가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미래를 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가끔 필요 이상의 간섭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의 인생의 구조적인 면에서 필요한 여유자금이나 건강을 챙기는 것 등 큼지막한 것들에 대한 대비를 할 뿐 그 외 적인 것들은 따로 설계하지 않는다.
결혼이 단지 사회적인 제도여서 싫은 것이 아니다. 단순히 좋고 싫고로 나눌 수 있는 거라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꽤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결혼이라는 울타리가 생기면 그 울타리를 나오기 전까지는 서로가 책임을 지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 변수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혹은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한 것들을 혼인이라는 사회적인 제도로 보완이 가능하다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아직은 나 스스로가 책임을 다하고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결혼을 언급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전 씨의 입장도 나와 결이 같다. 전 씨에게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함께할 때 행복을 우선시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 적당한 시기는 자신이 원할 때 그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라고 한다.
우리의 동거의 결말이 극과 극으로만 나뉜다면 결혼일 수도 있고 헤어짐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둘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중간 언저리에서 여전히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방법 또한 있을 것이다. 지난 과거야 어쨌든 떠나 가버렸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만 현재 주어진 지금을 잘 살아내면 미래에도 만족할 만한 인생을 살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