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손가락 틈사이로 간신히 머물던 남작부인, 잘 버틴다 싶더니 순식간에 뽑혀 낯선 손가락으로 휙 사라진다. 문득 그녀 없는 이곳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지 머릿속이 아찔하다.
굳건했던 왕이 무너질 듯하다. 찬란한 왕좌를 되찾고 싶은 마음만 가득할 뿐 우르르 몰려오는 적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시시각각 밀려드는, 번득이는 여섯 눈동자가 왕을 에워싸고도 남을 기세다.
고요하다. 언제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나 싶다. 험한 산세를 뚫고 적진을 향해 깊숙이 돌진했던 성터, 비록 3일 천하가 될지언정 꿈쩍 않던 왕좌가 움찔한 것만도 큰 수확이다.
짐작대로다. 왕좌를 내려놓은 왕도, 내숭을 던진 남작부인도, 왕좌를 위협하던 젊디젊은 적군도 다 편안해졌다. 서로 간에 겨눈, 팽팽히 이어진 가슴속 현들이 툭 끊어져버린 듯 모든 게 고요한 새벽이다.
가볍다. 이런 바람이라면 하루에 수십 번 몰아쳐도, 성터를 수없이 허물어도 좋을 것만 같다. 비 개인 성곽을 활짝 열어젖히니 아침햇살이 새 옷을 갈아입은 것처럼 말끔하게 들어서고 있다.
원래 이렇게 고집 센 사람이었나. 갈수록 낯설다. 그 낯섦이 익숙해질까 덜컥 겁도 난다. 그럴 때면 이십오륙 년 간 차가운 겨울바람이 압축되어 병 속에 단단히 숨어 있다가 한순간 그의 목을 타고 온몸으로 번지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마저 든다.
그날도 그랬다. 여느 때의 ‘그’라면 대수롭지 않을 일이었다. 밤 열한 시 쯤, 남편이 현관 앞에 왁자지껄 놓인 신발들을 보며 자신이외는 아무도 정리하지 않는다고 까칠한 잔주름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곤 나와 아이들을 향해 가장인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인 후 방문을 닫고 휙 들어가 버렸다. 순간 늦가을 찬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소름에 움찔하면서도 그게 저토록 성을 낼 일인가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고함을 꿀꺽 삼키며 살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 전엔 남편과 아들 녀석 사이에 아찔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둘 다 주장이 강하다 보니 소소한 마찰이 생길 때도 있지만 슬그머니 넘어가는 쪽은 남편이었다. 그날은 아니었다. 남편이 아들 녀석 종교관을 문제 삼은 것이다.
전쟁 하나가 엽서처럼 날아와 집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아들 녀석과 녀석이 수긍할 때까지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남편. 결국 달아오른 전구처럼 얼굴에 열이 먼저 핀 것은 남편이었다. 교회 세금에 대한 뉴스를 보다 언쟁이 붙었는데 무교인 남편이 기독교를 이기적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보다 못한 나와 딸아이가 중재를 나섰지만 그 후에도 아슬아슬한 공습경보가 몇 번이나 울렸는지 모른다.
술 때문에 옥신각신한 적도 있다. 애주가인 남편이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아들에게 사회생활을 하려면 술도 한 잔씩 해야 된다는 조언을 한 것이 문제였다. 남편의 술 이야기에 녀석이 술과 사회생활을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된 고정관념이라며 따지고 나섰다. 그때의 남편이 꽉 막힌, 구한말 쇄국정책 같은 느낌이라면 아들은 꼭 신문물을 공부하고 돌아온 개화파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엔 왜 저럴까 싶었다. 일 밖에 몰랐던, 집안일에 무심한 남편일 때가 차라리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 시절에도 없는 감성과 수다가 뒤늦게 핀 것인지 점점 자리 잡는 남편의 때 아닌 고집과 권위에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오히려 나와 아이들이었다.
금 밖에 있는 사람. 문득 남편을 금 밖으로 몰아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닐까 싶었다. 오랜 시간 일에 쫓기며 살다가 오십 넘어 금 안으로 들어와 보니 아이들은 이미 생각이 자라 버렸고 자신만 자꾸 금 밖으로 밀려나는 느낌. 고집도, 권위도 뒤늦은 감성도 씁쓸함에서 비롯된, 시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을 제안한 것은 딸아이였다. 봉화로 여름휴가를 떠나던 첫날 저녁, 다 같이 ‘달무티’라는 보드게임을 하게 되었다. 그 게임은 중세 유럽 신분사회를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먼저 내려놓는 사람이 다음 게임의 왕이 될 수 있다. 왕이 되면 게임 시작 전, 꼴찌가 갖고 있는 카드 중 신분 높은 카드 한 장을 더 받을 수 있고, 벌칙으로 낮은 계급에게 심부름을 시키거나 평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게임이다 보니 가볍고 들뜬 분위기에 담아둔 말들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화려한 왕관의 주인공 달무티, 파란모자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남작부인, 양떼를 모는 양치기와 옷을 만드는 재봉사 등, 게임할 때마다 다섯 손가락 틈사이로 무수히 들어오고 나갔던 그와 그녀들. 그들 덕분일까. 새벽녘까지 온 몸을 다해 싸웠던 네 명의 장수가 단단히 뭉치고 고인 이야기들을 미끄러지듯 풀어낸 것만으로도 아무도 패배한 사람 없는, 서로를 향한 한여름 밤의 봉화대첩이 되고도 남았다. 어디 봉화대첩 뿐일까. 적의 마음을 풀어헤치는데 이만한 백전백승 게임이 또 있을까.
별도 달도 없는 캄캄한 하늘이 마치 검정색 벨벳 천처럼 펼쳐져 있다. 가슴 속에 팽팽히 잡아매진 현이 언제 있었나 싶게 고요한 새벽이다.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지만 치열했던 성터는 무반주 첼로처럼 고즈넉해졌다.
비 개인, 고집도 전쟁도 사라진 성터로 말끔한 아침 햇살이 멀리서 들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