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툭하고 허연 조각들이 모양새 없이 놓여 있다. 아무렇게나 잘라 놓은 듯 종이위에 나동그라져 있는 무 다섯 조각. 그 중 하나를 집어 입 안으로 넣는다. 머뭇거리던 딸아이도 나를 힐끔 보더니 얇고 작은 녀석을 골라 집는다.
겉은 누추해 보여도 저장무라 맛이 달다며 권하는 투박한 손 하나. 무 조각에 덤으로 딸려 온 마음 때문인지 생무를 좋아하지 않는 딸아이도 거친 손에 생기 얹듯 무 조각을 아삭거린다.
“어서 들어오세요. 환영합니다.”
“무슨 그런 얄궂은 인사를, 그런 인사는 하는 게 아니지.”
“아무렴 어때. 사람 오면 반가운 거지.”
수술을 하루 앞둔 딸아이와 507호로 한 발을 들이는 순간 하얀 병실을 에워싸는 왁자지껄한 소리들. 병상에 앉은, 나이 때가 다른 환자 셋이서 때 아닌 환영인사를 하는 바람에 딸아이도 나도 얼떨결에 웃음으로 신고식을 하고 만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딸이 닫았던 커튼을 열어젖히자 또 한 마디씩 거든다.
‘어린 학생이 설 앞두고 세뱃돈을 받으러 다녀야지 병원은 왜 왔을까?’
‘에구 자식이 아프면 엄마만 고생이지.’, ‘멀쩡해 보이는데 속이 아픈 건가?’,
그러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 싫어하는 사람도 많아.’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이상한 것은 아무 말이나 툭툭 던지는데도 그 소란스러움이 싫지 않다. 말만 앞으로 내달리는 게 아니라 말 안에 마음도 함께 담아 내달린다는 것을 나도 딸아이도 느꼈기 때문이다.
수술이 끝나고서야 아니 딸아이가 마취에서 깨어나 내 얼굴을 알아보고서야 조바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수술하는 한 시간 반 동안 혹시나 잘못될까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지도 그렇다고 그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한 채 다람쥐처럼 줄곧 수술실 입구만 맴돌았다. 전광판에 보이는 ‘수술 중’이라는 글자가 ‘회복실 이동’으로 바뀌기를, 저 중앙 문을 열고 의사 선생님이 나오며 잘 되었다는 말을 해 주기만 바랐다.
근처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딸아이 어깨 밑에 생긴 혹이 악성종양일 수 있으니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몸에서 혼이 스르르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정밀검사를 하고서야 걱정을 덜었지만 수술은 차치하고 나쁜 게 아닌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었다. 겁 많은 아이가 그나마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미리 마음고생을 한 덕분일 것이다.
우려했던 부작용도 없었고 수술 후 상처도 크지 않았다. 게다가 집에서 먹는 잡곡밥 대신 하얀 쌀밥 나오는 병원 밥이 맛있다며 무엇이든 골고루 잘 먹는 바람에 예정보다 이른 퇴원을 본인 스스로 아쉬워하기도 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집과 병원 그리고 일터인 학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다 보니 몸이 지치는데도 퇴원하는 날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원 첫날 얄궂지만 유쾌한 목소리로 반겨주던, 병상에 좀 더 머물러 있을 환자 셋과의 이별 때문일 것이다.
수술에 대한 조바심으로 잠을 설쳤던 입원 첫날 밤이다. 계단에서 넘어져 오른 다리에 깁스한 오십 대의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여자가 딸아이에게 새벽 다섯 시면 남자 흡혈귀가 찾아와 피를 뽑으니 조심하라고 겁을 주었다. 알고 보니 남자 간호사를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혈관을 못 찾아 헤매는 바람에 남자 흡혈귀에게만은 피를 주고 싶지 않다고 몸서리치는 걸걸한 그녀가 재미있어 걱정을 덜어 내기도 했다.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아들 녀석에게 딸아이 간호를 맡겼더니 허리 디스크 수술 후 회복 중인 육십 초반 아줌마가 둘이 어떤 관계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 데다 대낮에 커튼까지 닫고 있어 남자친구인줄 오해했다는 말에 아들도 딸아이도 적잖이 당황했던 모양이다.
처음엔 그 부산스러움이 적응되지 않았다. 그러다 차츰 힘들고 무료한 병원생활을 견디는 방편이 아닌가 싶었다. 아침에 병상에서 일어나 누구든 먼저 말문을 열면 오늘 일정이나 간밤 흡혈귀 이야기 등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어쩌다 시어머니나 며느리 이야기에 이르면 가속도까지 붙어 병원인지 오은영 상담소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딸이 입원하는 동안 귀에 딱지 앉도록 들은 말이 ‘아들 소용없다’는 이야기다. 당뇨와 어지럼증 앓는 팔순 할머니가 시장에서 건어물 장사하며 아들 셋 키워 장가보냈더니 아들도 며느리도 손님처럼 왔다 갈 뿐이라고 하소연하는데 그때마다 눈가가 촉촉해진다. 아픔은 왜 늙지도 않는지. 그 눈 바라보다 까치발처럼 여윈 손이 눈물을 닦으면 안타까운 생각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육남매 맏며느리로 사십 년 넘게 명절 제사를 지내온, 디스크 수술한 아줌마는 일부러 설 앞두고 입원했다고 한다. 자기 없는 명절을 어떻게 보낼지, 할 수만 있다면 추석까지 머무르고 싶다는 그녀 말에 다들 웃으면서도 못할 것은 뭐 있냐며 거든다. 나한테도 아이 핑계 삼아 명절을 지내지 말라는데 딸 얼굴 보니 그럴 것 같지 않다.
퇴원 수속 밟고 올라오니 딸 앞에 하얀 접시 하나가 들려져 있다. 아들 소용없다는 할머니가 줄 것이라곤 당신 좋아하는 무밖에 없다며 갖고 온 것이다. 무 한 입 먹고 건강해지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왜 눈시울이 시큰해지는지. 주름 많은 할머니 손에 들린 무가 싱싱했던 세월을 돌이키고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그 무처럼 할머니가 어서 쾌유되었으면, 외롭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커서일까. 육 남매 맏며느리도, 다리에 깁스한 쉰 살 노처녀도 무 한 조각씩 둘러 먹으며 딸아이에게 더 이상 병원에 오지 말라고 당부하는데 걸음과 어긋나게 마음이 자꾸만 뒤돌아진다.
할머니가 나눠 준, 따뜻한 무 다섯 조각. 겉은 누추해도 속은 달다고 했듯 딸 때문에 걱정 많았던 시간도 꿰맨 수술 자국처럼 잘 봉합되어 달게 여물어진 것 같다. 열흘 이웃이지만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세 사람, 그들도 빨리 쾌유되어 몸도 마음도 달콤한 무처럼 아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