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안 오는 새벽의 잡생각 한 조각
갑자기 브이 포 벤데타가 떠오르네.
나 그 영화 좋아했었지. 사실 과하게 정치적인 영화는 취향은 아님에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세지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나오는 브이랑 박사의 대화 때문에.
정부의 억압 하에 실험체로 쓰인 브이는 피의 복수와 대중의 자유를 꿈꾼다.
그 중 한때 인체 실험을 주도했던 한 노년의 여성이 잠든 사이 약물을 주사해 그녀를 살해한다.
그녀는 한 때 희생자들을 만든 의학실험자지만,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반성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브이가 올 줄 알고 있었다. 문득 낯선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깨어나는 여인.
브이가 찾아왔다. 공포에 떨기보다는 침착하게 순응한다.
"당신이 올 거란 걸 알고 있었어요. (중략) 절 죽일 건가요."
"(주사기를 보이며)이미 죽였소. 10분 전 당신이 잠든 사이에."
"고통스러울까요?
"아니."
"고마워요."
"..."
"지금이라도 사과한다면, 의미 없는 짓인가요?"
"전혀."
"정말로 미안합니다."
https://youtu.be/Yq1qMRmimiQ?feature=shared
내가 봤던 모든 영화 속 장면 중 이 장면이 가장 명장면인 것 같다. 처음 봤을 때부터 가장 임팩트가 컸고, 때때로 떠오를 만큼 울림이 크다.
여인은 본인의 과오를 반성했고, 그것을 만회하려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브이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죽인다. 반성을 했다고 해서 저지른 과오가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고, 행동에는 마땅한 책임이 뒤따라야 하므로. 그래도 그녀가 반성했다는 걸 감안해, 가장 고통 없는 방식의 죽음을 선사한다. 그녀는 그의 배려에 감사함을 표한다.
그리고 그녀는 브이에게 사과한다. 반성이 없었다면, 자신의 생명을 빼앗은 상대를 비난하거나 조롱했을 것이다. 본인의 죽음을 알기 전 사과를 했다면, 생명을 구걸하는 행위로 보여 역겨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본인의 죽음을 납득하고 수용하고서도, 생의 마지막에나마 피해자에게 사과를 전한다. 그래서 그녀의 사과는 진중하고 묵직하며 진실하다. 브이의 복수조차도 그녀의 잘못을 무로 돌리지는 않는다. 그것 역시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과는 의미 없지 않다. 브이도 그걸 알고 관객도 그걸 안다.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 죄 지은 대상에게 복수를 당하여 죽는 저 장면이 내가 본 수백 편은 족히 될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아있다는 건 나 스스로도 정말 아이러니하다. 아니지, 진정 아름다운 인간성이란 반성하고 사죄할 줄 아는 성숙함이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주변에서 오히려 찾기 힘드니 영화 속에서야 더욱 더 아름답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