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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예 Apr 23. 2020

7. 만유인력-2

핥고 싶은 마음


나는 멀리서 가만히 일하고 있는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체구 자체가 커서, 기성복으로 제작된 가운이 약간 터질 듯이 맞았는데 난 그 점이 정말 좋았다. 그는 복잡한 환자가 있거나 고민되는 처방이 있으면 아주 곤란하다는 듯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하, 하고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했는데 그것 또한 매력적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더 자주 화를 냈는데 주로 그 대상들은 인턴이나 남자 의대 실습생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간호사들에게는 퍽이나 친절해서 나는 기분이 좀 상했다.


나는 본원 병원에서 실습을 돌다가 세미나를 위해 잠시 지방 분원에 방문한 참이었다. 예과 2년과 본과 2년을 거치면 실습을 돌게 된다. 병원에 따라 명칭은 다르지만 우리는 이런 의대 실습 학생들을 두고 폴리클이나 PK들이라고 불렀다. 보통 폴리클 조는 한 조에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과에 따라 3명씩 두 조로 나누어 돌기도 하고, 6명이 전부 다 같이 돌기도 했다. 나와 같은 조에 속한 동기들 중 몇몇은 나와 대학 입학 당시부터 꽤나 친하게 지낸 아이들이어서 나는 실습 생활이 비교적 수월했다. 반면에 지각쟁이나 무임승차, 물음표 살인마(!)들이 속한 조에 있는 일원들은 이 실습 생활이 아주 고역이었다. 그 날 우리 조 6명 모두는 아침 일찍 모여 전철을 타고 지방 분원으로 향했다. 세미나는 8시부터 시작해서 9시쯤에는 완전히 마무리가 되었는데, 우리는 빨리 돌아가 봤자 귀찮은 일만 생길 것이라는 판단에 이 근처에서 시간을 좀 더 보내기로 결심했다. 뜻이 잘 맞아 다행인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주변에서 놀 곳을 찾다 보니 완전히 낯선 곳이라 돌아다니기도 겁이 났고, 우리는 멍하니 병원 카페에 앉아서 수다를 떨다가 커피 한 잔씩을 테이크 아웃해서는 병원 곳곳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를 본 것이다. 지난번에 그가 일하는 모습을 대했을 때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아니 지금도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할 수 있나? 우리는 커피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그가 이따금 당연한 것처럼 내 손을 잡기도 했는데. 그가 내게 사귀자고 말을 했나? 그것도 아니면 그가 내게 좋아한다고 말을 했었나.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내게 '네가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라고는 했지만 '내가 널 좋아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스물네 살에게 그건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아서였는지는 몰라도, 아니면 그가 워낙에 잡히지 않을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렇게 멀리서 그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남몰래 저 사람들은 모르는 그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며 뿌듯해하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저 사람이랑 연인 사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게 다가가 나 여기 있다고, 이렇게 아는 체를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절대로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세운 원칙이었다. 아주 유치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하면 그는 분명히 의기양양해질 것이고, 내가 아주 쉽게 생각될 것이고, 그러면 내게서 이내 흥미를 잃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사실 연락을 누가 먼저 하느냐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내가 그런 원칙을 정했기 때문에 나는 더 괴로웠다. 그의 연락만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우위를 점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는데, 나는 되려 초조해졌다. 반면에 그가 연락을 해 올 때는 아주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쉽게 내게 말을 거는 듯해서, 나는 매번 그에게 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복잡한 상태로 동기들과 병원 탐방을 마치고 남은 커피를 쪽쪽 빨대로 빨면서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마음이 답답했다. 내가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든 찰나에 맞은편에서 그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휘적휘적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는 나를 보며 처음에는 놀란 듯하더니,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제일 환한 웃음을 지었다. 작지 않은 두 눈이 휘어지고, 콧잔등마저 찡긋하는 그런 웃음. 그건 우리 둘이 있을 때도 전혀 본 적이 없는 표정이어서 나는 사실 당황했다.


"안녕."


그는 내 어깨에 살짝 손을 얹고는 지나쳤다. 내가 미처 답인사를 하기도 전에.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그가 아직도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기를 바랐지만, 그는 가운 뒷자락을 날리며 급하게 뛰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런 식이었다. 나를 한껏 들뜨게 하여 그 벅차오름에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지게 만들다가도, 이내 그 기대를 저버리게 하는.


"헐.. 너 저 선생님이랑 알아?"


여자 동기 한 명이 나를 툭 치며 물었다. 아주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좀 뿌듯해졌다.


"아니 뭐, 전에 실습 돌 때 봤었어."

"근데 왜 이렇게 웃으면서 인사를 해?"

"몰라 원래 그런가 보지."


나는 남들이 보기에도 정말 환한 웃음이었구나, 라는 생각에 두근거렸다. 어떻게 하지? 나 정말 좋아. 좋아서 미칠 것 같아. 나는 얼굴이 붉어져있음을 느꼈지만 모른 체했다. 여자 동기는 집요하게 실습 돌 때 친했던 거냐, 언제였냐, 연락처도 아는 사이냐, 라는 것을 물어댔지만 나는 중간에 아는 선배가 끼어있어서 실습 때 조금 챙겨줬을 뿐이라고 잡아떼며 거짓말을 했다.


나는 그가 내게 자신의 사진을 보내오고, 자신의 물건을 주고, 그런 웃음을 보여준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마음이 참으로 연약하고 비밀스러워, 나 혼자서만 알고 싶었다. 내 방 깊은 곳에 숨겨두고, 아주 달콤한 사탕을 먹는 것처럼 조심스레 핥고,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싶었다.


그가 나와 사귀지 않는 이유


"너 나 말고도 만나는 사람 있지."


그가 잔뜩 심각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난 황당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를 봤다. 그는 이따금 그런 어처구니없으면서 사람 속을 다 긁어놓는 질문을 했다.


"무슨 소리예요, 그게."


아니, 애초에 나한테 사귀자고 하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누구를 만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와 나는 정말 말 그대로 '만나고'는 있었지만 그게 내가 생각하는 '만남을 갖는다'라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솔직히 나는 계속해서 그가 우리 사이를 확실히 정의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나를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가면, 나는 집에 들어가는 척하다가 다시 나와 집 앞 놀이터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와의 만남을 처음부터 헤어지기 직전까지 샅샅이 훑었다. 나는 그런 변태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난 그의 1분 1초도 잊고 싶지가 않아서, 손가락으로 가는 실들을 가지런히 고르듯이, 그렇게 그와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그가 숨을 내쉬던 방식, 스치듯이 내 이마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이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눈빛을. 외로움으로 하얗게 질려버린 그 눈을, 나는 너무나도 사랑했다.


"난 네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넌 아직 어리잖아. 근데 나를 왜 만나. 나이도 많고 바쁘고 연락도 안 되고. 날 왜 만나냐?"


그의 말투가 투정 부리듯이 들렸다면 나는 그가 귀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잔뜩 짜증이 난 말투여서 나는 약간 겁에 질렸다. 그가 머리를 흐트러뜨릴 때마다 비 온 뒤의 나무 냄새가 났다. 그 물음에 대답할만한 말은 하나였다. 내가 그쪽이 좋아서요. 너무 좋아서요, 진짜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 무서워서 도망갈 정도로 좋아해서요.


그러나 나는 고집스럽게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알았듯이, 나는 그에게 그의 누나 같은 여자여야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넘을 수 없는 여자.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여자. 자신에게 무심한 여자. 그는 그런 여자에게만 끌렸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 역동이라는 것은 정말 신기해서, 나는 그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 그의 엄마 같은 여자가 되고 싶었다. 한 없이 주고, 아끼고, 모든 것을 다 내바치고 싶은 그런 충동이 들었다. 그에게 버림받은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랬듯이.


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그는 나를 가장 알아줬으면 하는 사람인데, 그가 나를 몰라야만 나는 그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와 만나고 헤어져 집에 오면 항상 불안했다. 이렇게 매번 이별한 듯이 아프다면 그만두는 것이 맞다고도 생각했다.


"오빠는 날 왜 만나는데요."

"야.. 너 진짜."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뚫어지게 보면서 말했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가슴 떨리는 일이어서 나는 두 손을 꼭 쥔 채였다. 그는 그 말을 듣고는 항상 보이는 그 어이없다는 마른 웃음을 파하, 지어 보이고 나를 보았다.


"너 진짜 어리네."


난 사실 속으로는 그가 내게 정식으로 마음을 고백해주기를 바랐나 보다. 왜 만나기는, 내가 널 좋아하니까, 나 너 진짜 좋아해,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오프 때마다 이렇게 널 보러 오겠어, 이렇게 말해주기를 바랐나 보다. 그런데 그는 내게 저따위 말만 남겼다. 내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을.


"내가 너 데리고 뭐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

"집에서는 결혼하라고 난리인데. 내가 너랑 지금.."


결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 단어를 듣자마자 속으로 헐..이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진짜 헐..이었다. 결혼이라뇨? 그제야 그와 내가 정말 다른 세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훅 끼쳐왔다.


"너 나랑 결혼할 거야?"


그가 갑자기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내게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물었다. 어.. 음.. 내 솔직한 마음은요, 결혼이고 뭐고 그게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쪽이 나한테 하자고 하면 나는 할 거예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정말 내가 심각하게 그에게 빠져있구나 싶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우린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나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이 말이 아마 내가 그에게 했던 많지 않은 말들 중에 가장 내 진심과 가까운 말이었을 것이다. 사귀자고 얼른 말하라고 이 자식아! 이런 뜻이었지만 나는 저렇게 말하고는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


"... 시간이 너무 없어."


그가 엉뚱한 말을 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분명 그에게 고백을 한 것이었다. 사귀자고. 그런데 그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든, 저 말이 우리 관계에 있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한 말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가 났다. 역시 나를 갖고 놀았구나. 나는 그동안 그가 내게 했던 숱한 애정표현들이나 손길들은 모두 잊었다. 그저 화가 났다. 나를 갖고 놀았어. 나를 속였어. 나는 억울하고 분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눈 앞에 놓여있던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오빠 저 갈게요."

"갑자기 왜?"

"그냥요."

"... 나 말고 오늘 만날 사람 있어?"

"..."


그런 사람도 없고,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도 없었지만 나는 그에게 상처 주고 싶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싫음 말어, 야, 나도 딴 사람들 만나고 다닐 수 있어. 그쪽이 좀 잘생기고 키도 크고 몸도 좋고 말하는 것도 달콤하고 나랑 영화 취향도 비슷하지만, 그런 것쯤 더 괜찮은 남자 만나면 그만이야. 됐어, 나도 됐다 이거야. 나는 아주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래 가."


그가 내 쪽을 보지도 않고 말하면서 커피잔을 잡았다. 나는 더욱 화가 나서 그의 앞에서 말을 아끼자고 다짐했던 것, 어린 여자아이인 것을 드러내지 말자고 나 자신과 약속했던 것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조금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오빠 진짜 짜증 나요. 이제 만나지 마요."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숨 쉬기가 너무 힘들어서 일부러 뛰었다. 뜀박질 때문에 숨이 가쁜 것이라고 착각하고 싶어서. 버스에 올라타서 나는 헉헉거리며 그를 차단해버렸다.


이거면 됐어. 내가 먼저 찬 거야. 난 상처 안 받은 거야. 내가 상처 준거야. 그러면 됐어. 난 다치지 않았어. 괜찮아. 그가 연락을 해와도, 내가 차단했기 때문에 못 보는 거야. 그가 연락을 안 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상처 받을 필요 없다.


나는 혼자 속으로 몇 번이나 스스로를 확인시켰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서 나는 그의 근황이 너무나 궁금해서 슬그머니 차단을 풀었다. 그 일주일 간에 연락이 왔었는지 안 왔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정말 간절했다면 전화를 했겠지, 집 앞에 찾아왔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상처 받기 싫어서 먼저 상처를 준  했는데, 나는 아주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 못해 작고 작은 조각들로 산산이 부서져 날리고, 또 바람에 쓸려 여기저기 흩어져서 주워 담을 수도 없이 물에 적셔지고. 그대로 그렇게 흔적도 없이 땅으로 스며든 느낌이었다. 당신의 최선, 내게는 절대로 위로가 없는.



그를 생각하면서 영화 <셰임>을 봤다. 마이클 패스밴더가 어딘지 모르게 그와 닮아있어서 나는 슬펐다. 영화 말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는 그저 상처 받은 사람들일 뿐이야."


네가 날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서워,라고 말하며 내 볼에 손을 갖다 대던 그의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밤이 되어 내 방 맞은편 아파트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벽에 그림자들을 만들면, 검은 형상들이 흩어졌다 모였다 하며 그를 그려냈다.


그 순간, 그때에,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미친 듯이 원했다는 걸. 모든 말이 진심이었을 수도 있다는 걸.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알아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이제는 도망쳐야 한다.


나는 울면서 일기장에 그렇게 썼다.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인연이라는 건 이다지도 잔인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일격을 가한다.


나는 또다시 아주 우연하게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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