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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Aug 25. 2024

퍼펙트 데이즈 - 찬란한 과거에 대한 향수

영화에는 옥탄가가 있다. 휘발성이 강한 영화는 극장을 나오는 순간 바로 잊혀지고, 어떤 영화는 꽤 오랫동안 내 삶에 남아있다. 전자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영화마다 의도와 기능이 다를 뿐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만큼 짜릿한 영화를 만들어 극장 경험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애시당초 높은 휘발성을 목표로 했을 것이다. 어렵지 않은 즉각적인 감정 변화를 유도하는 영화들은 휘발성이 높을 수 밖에 없다. 우린 이런 휘발성 높은 영화를 사랑한다. 반대 급부에 있는 영화들은 도리어 예술성이 높다고 애둘러 포장하지만 지루하고 어렵다고 싫어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고, 주인공의 감정은 애초에 따라갈 수 있게 설계된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몰입하기 힘들다. 후자의 경우 취향을 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예술영화들은 관객을 끌어들이기가 힘들다. 영화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설왕설래가 이루어지고, 누군가는 쓰레기라고 하는 영화가 누군가에겐 인생 영화가 되기도 한다. 이런 영화들은 휘발성이 매우 낮아서 젖은 장작, 희나리 같다고 표현하고 싶다. 감정에 불을 붙여야 하는데, 잘 붙지가 않는다. 희나리는 불이 잘 붙지 않지만, 결국에는 열에 의해 수분이 증발하고, 타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영화에 대한 관심이 식어서 예술병 걸린 감독이 만든 예술영화로 기억되고,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는 기어코 수분이 증발해 타기 시작해 인생 영화로 남는다. 올해 본 영화 중 극장을 나오고 나서 가장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있다가 결국 타오르기 시작한 영화가 바로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다. 


나는 빔 벤더스 감독의 팬이 아니다. 주변 영화 감독들이 추앙하는 감독 중에 내가 추앙하지 않는 감독이 꽤 있다. 나는 희나리를 불태울 만큼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고, 젖은 수분 안에서 나무를 찾아낼 만큼 문학적 깊이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레오 카락스 영화를 여전히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여전히 고평가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퍼펙트 데이즈를 보지 않았다면 빔 벤더스 감독도 같은 카테고리에 있었을 것이다. 영화 지인 중에 아직 입봉하지는 못했지만 가장 핫한 감독과 함께 상업장편을 준비중인 친구가 빔 벤더스의 신봉자인데,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벌써 5년째 [파리, 텍사스]의 한 장면이다. 난 그 영화를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감독의 팬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볼 생각이 없었지만, 자꾸 주변에서 영화가 좋다는 소리가 나오자 궁금해졌다. 심지어 씨네필이 아닌 사람도 영화를 칭찬하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너무 좋았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가. 전형적인 빔 벤더스의 지루한 영화인데 왜 이 영화는 좋다고 생각한 거지? 일본 배경의 일본인 주인공 영화라 내가 감정이입이 더 잘 됐나? 유학파 출신이라 지금까지 딱히 그랬던 경험이 없는데? 여러가지로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영화를 본지 한달이 넘게 지나고나서야, 왜 내가 그토록 영화를 재밌게 봤는지 분석이 끝났다. 오랜만에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분석을 하게 만든 영화이기에 영화 평론을 잘 안 하려 하지만 몇 글자 적어보려고 한다. 


영화 줄거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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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가 거의 없는 영화의 주인공은 일본의 중년 남성으로 도쿄 토일릿 회사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다. 아침에 일어나 나무에 물을 주고 이빨을 닦고 회사유니폼을 입은 후 집 앞 자판기에서 BOSS 커피를 뽑아 소형밴에 타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지정된 화장실로 나가 하루종일 도쿄 구석구석의 공중 화장실을 청소한다. 점심시간엔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캔커피를 사서 신사에 가서 자연을 벗삼아 먹으면서 주머니에 넣어둔 자동 필름 카메라로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을 찍는다. 일이 끝나면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단골 술집에 가서 술을 한잔한 후 집에 와서 종이책을 읽다가 잠에 든다. 주말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나가 코인 세탁소에 가서 세탁을 돌려놓고 현상소에 가서 인화된 사진을 받고 새 필름을 맡긴다. 헌책방에 가서 책을 산 후 주말에만 가는 단골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다 세탁물을 찾고 집에와 책을 읽다 잠든다. 


영화는 주인공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스케쥴에 대한 강박으로 보일 정도로 반복되는 일상을 살지만 주인공은 누구보다 평화로워 보인다. 모든 사건은 주변인물 때문에 발생하며, 따라서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의 완벽한 생활을 방해하는 방해꾼처럼 느껴진다. 주인공은 자신의 생활패턴을 바꾸고 싶지 않아 하며, 주변 인물들의 간청으로 바꿔야 할 때면 마지못해 도와주긴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완벽한 사람일까? 이미 자신의 인생에 대한 답을 찾았기 때문에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인데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방해를 받고 있는걸까? 당연하게도, 그렇지가, 않다. 


주인공이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를 매우 간접적으로만 알려주고, 단 한 씬만 부여된다. 연을 끊고 사는 가족, 동생이 찾아오는데 기사를 대동한 고급 세단을 타고 온다. 이제 아버지도 예전처럼 굴지 않을 거라며 돌아오라고 하지만 주인공은 대답하지 않는다. 관객이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은 주인공이 굉장히 잘 사는 집안에서 자랐다는 것과, 현재는 가족과 연을 끊고 오롯이 홀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땠는지, 무엇때문에 가족에게 등을 지게 됐는지는 관객이 해석해야 한다. 나는 주인공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잘못을 한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야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지 해석이 된다. 


주인공은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주변 모든 인물들은 스마트폰을 쓰지만 주인공은 피처폰을 쓴다. 카세트 테이프로 음악을 듣고,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종이책을 읽는다. 필름 카메라 마니아 사이에서 인기 있는 아날로그 수동 카메라도 아니고 필름 이외엔 모두가 전자동인 자동 카메라다. 즉, 주인공이 애용하는 모든 것들은 8-90년대의 물건들이다. 30여년 전에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인지, 그때가 잘못을 저지르기 전의 시간대인지, 주인공의 시간은 그때에 멈춰있다. 그래서 주인공의 직업이 화장실 청소노동자인 것이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결벽증으로 보일만큼 화장실 구석구석의 자국과 때를 완벽하게 없앤다. 본인이 직접 도구를 개발하면서까지 완벽하게 닦아내려 한다. 이 행위는 '새로 생기는 것'을 없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행위로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의 배설물을 치우는 장면은 존재하지 않고, 영화는 오로지 새로 생긴 자국을 없애는 장면만 보여준다. 그래서 주인공의 행동이 단순한 청소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행태로 해석됨과 동시에 더러운 것을 없애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인공이 과거에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석하게 되는 이유다. 


반복되는 일상의 찬란함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하기엔 주인공의 행동들이 모두 의미심장하다. 특히, 엔딩에서 연기의 절정에 오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슬픔과 행복을 동시에 보여주는 야쿠쇼 코지의 표정은 이 영화가 단순히 일상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찍은 영화가 아님을 강변한다. 영화의 제목인 '퍼펙트 데이즈'는 단수가 아닌 복수다. 영화에 Lou Reed의 Perfect day라는 곡이 삽입되어 있음에도, 영화의 제목은 Perfect days다. Perfect day라고 하지 않고 days로 굳이 복수로 붙인 이유는, 완벽한 날로만 해석되지 않고 '과거의 찬란했던 시절'로 해석될 수도 있게 감독이 열어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크레디트 롤이 모두 흐른 후 마지막에 코로레비를 설명하는 문구가 나온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뜻하는 일본어인데, 사전적 정의만 설명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용어가 '빛이 비치는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의미를 부연 설명한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만들어내는 찬란한 빛은 그 순간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필름 카메라로 찍는 것은 오로지 코모레비 뿐이다. 주인공은 이 찬란한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 순간이 지나면 더이상 의미가 없어짐에도 불구하고, 그 찰나의 순간을 사진에 담아 간직하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행위는 지나간 것에 대한 집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반복되는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주인공을 방해하는 마지막 인물은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환자로 자신의 전처를 보러 왔다가 전처가 운영하는 술집의 단골 손님인 주인공과 마주치게 된다. 죽어가는 환자가 죽기 전에 자신의 전 처를 보러 왔다는 것은, 찬란했던 과거를 추억하고자 하는 주인공에게 연민을 불러 일으키고, 주인공은 말기암 환자와 어린 시절 즐겼던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한다. 희끗희끗 머리가 샌 중년의 남성 둘이서 어렸을 적 했던 놀이를 하며 즐거워 하는 모습은 그토록 그리워 하는 과거의 향수에 대한 정점이다. 


중년 남성들 사이에서 퍼펙트 데이즈가 인생영화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것이 영화가 반복된 일상의 찬란함을 보여주어 반강제적으로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는 중년 남성을 위로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미가 곧바로 해석되지 않더라도 과거의 향수에 대한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전달되고, 이 희나리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오래도록 가슴 속에 남아서, 결국에는 불이 붙어버리기 때문이리라. 특히 일본은 버블 경제가 무너지고 나서 찬란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중년이 많기 때문에 이 영화가 더 울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굳이 버블 경제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정은 인류의 보편적 감정이다. 아직 40밖에 먹지 않은 나에게 이 영화가 사무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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