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왔던 휴양지를 한번 더 왔다. 꼭 1년 만이다. 그렇게 의도했던 건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그렇게 되었다. 같은 곳에 왔음에도 느낌이 사뭇 다르다. 왜 작년만큼 신나지 않은지 궁금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명징했지만, 나는 그것을 못 찾아내고 있었다. 여행 마지막날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돌아가서 뭘 할 지를 생각하는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 같은 건 없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이래서 이번 휴가가 신나지 않았구나.
작년엔 휴가를 오기 직전까지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메달려온 상업장편 각색건이 이제 막 끝나던 시기였다. 캐스팅을 기대했지만 끝끝내 되지 않았고, 그래서 다른 아이템을 해보자며 피디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흐지부지 관계가 끝나버렸다. 2023년이 영화계 커리어 정점을 찍을 때였고, 일이 많았던 터라 오랜만에 놀러 나가는 거였다. 그래서 여기 있는 동안은 일 생각하지 말고 마냥 쉬자면서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이번엔 일이 없는데 휴가를 왔다. 같이 가자는 사람 때문에 온 거였는데, 나는 아무 일이 없으니 혼자라도 더 있다 가겠다고 해서 일주일을 왔다. 일을 쉬자는 생각 자체를 못한다. 일이 있었어야 일을 쉬지. 그래서 여기서 일을 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소설을 쓰고. 오히려 그게 마음이 편했다. 내가 탱탱 놀고있는 상황에서 휴가를 즐기려 했다는 게 패착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한량이 될 수 없는 종자임을 이미 진작에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한량짓을 하려고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가 뭐하고 있는거지, 내가 이렇고 있어도 되나 의 무한반복.
엄밀히 말하면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그만 영화를 준비중이고 저예산이기 때문에 내가 거의 모든 것을 도맡아 해야한다. 제작자나 PD가 있었다면 그들에게서 멀어져 쉬는 느낌이라도 났을텐데,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내가 한국에 없으면 그저 프로젝트는 중단될 뿐이다. 아무도 날 찾지 않는다.
여행 다니는 것을 참 좋아했다. 내 동년배 지인 중에 나보다 더 많은 나라를 간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세계일주 같은 걸 한 건 아니지만, 남들보다 여행가는 것을 귀찮아하지도, 두려워하지도, 꺼려하지도 않았을 뿐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동남아에서 네 달을 있으면서 깨달았다. 내가 한량이 될 수 없는 존재임을. 나는 무언가를 해야한다. 그래서 돌아왔다. 회사를 그만두고 딱 1년 반 후의 일이었다.
이미 그때 깨달은 것을 나는 까먹고 일이 없음에도 휴가를 길게 왔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건 휴가의 낭비다.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라도 바쁘게 살아야겠다. 바쁘게 사는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 얼마나 배가 불러 보일까. 내 동년배들은 이제 회사에서 임원 케이스를 타거나 밀려난 것을 빨리 깨닫고 스타트업 쪽으로 빠지는 시기다. 영원할 것 같던 대기업 직장이 10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을까. 그러나 저러나 없어질 영화판에 뛰어든 나보단 나은 거지만.
내일이면 돌아간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우울한 일상으로 돌아가 마음껏 우울해 해야겠다. 비행기 타고 와서 리조트에 있으면서 우울해하기엔 내가 돈이 너무 없다. 5월 연휴도 있고 여름도 다가오는데 다들 휴가 계획은 세우셨나. 열심히 일한만큼 휴가가 즐겁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라. 더욱 휴가가 즐거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