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위 지원 프로그램 면접을 보러 부산에 내려왔다. 영화 관련 면접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압박면접 이었던 것 같다. 압박면접이 지원자의 경쟁력을 보기에 적합치 않다는 데이터가 나온 이후 회사에선 더이상 안 하게 된지 꽤 된 것 같은데 영화계는 어림없다. 울컥한 마음에 한마디 해줄까 하다가 참았다. 더이상 영화를 하지 못하고 영진위에서 일을 하고 있는 전직 감독들에게 뭐라 해봐야 나만 손해 아닌가.
가장 공격이 많이 들어왔던 부분은 개연성과 경력이었다. 예술영화 뽑는 곳에 상업영화를 지향하는 사람이 왔다는 것, 장편을 못 찍은 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인데 장편을 찍은 사람이 왔다는 것, 시놉시스에 개연성이 없다는 것. 내가 과대경력이면 애초에 서류에서 탈락을 시켰으면 될 일인데 왜 부산까지 불러놓고 그런 얘길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서류 심사 하는 사람 따로, 면접 심사 하는 사람 따로라서 벌어진 일이겠지만 서로 조율 좀 해라 준국가기관이면. 시놉시스 한 페이지 짜리에서 개연성 따지는 것도 너무 웃기지 않나. 면접 내내 심사자들이 시나리오를 다 읽은 걸로 착각하고 면접에 임했다. 대답하다가 본인들은 시나리오를 본게 아니라고 하길래 깨달았다. 그렇네, 이 사람들 지금 한 페이지 짜리 시놉보고 얘기하고 있는 거잖아? 그때부터 웃겨가지고 대답을 안 했다. 그냥 그렇군요 하고 넘겼다. 면접관들이 눈치를 챘는지 자기들도 웃더라. 내가 원하는 반응을 안 해주니까. 상업영화 판에서는 독립장편을 장편으로 쳐주지도 않고, 독립영화 판에서는 과대경력 취급받고, 이런게 미생 아닐까.
면접비도 교통비도 주지 않는 훌륭한 프로그램 덕분에 억울한 나머지 부산영화제를 보고 있다. 다른 일정을 취소하면서까지 영화제를 즐기고 있는데, 너무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서는 아니고 오직 한 사람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인 사람. 주윤발이 부산에 왔다. 그리고 공교롭게 내가 부산에 온 날 오픈토크를 한다고 했다. 달려갔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 전 오픈토크를 강제로 보게 되었는데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부산국제영화제는 넷플릭스 홍보의 장이 되어있었다. 집행위원들이 다 사퇴해서 비대위 체제로 치뤄지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는 스스로 시리즈 홍보의 장이 되기로 단단히 결심한 것 같았다. 오픈토크의 대부분이 OTT 영화이거나, OTT 시리즈의 영화용 편집 버전이었다. 독전2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고, 발레리나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다. 넷플릭스 공개보다 훨씬 앞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진행자의 말이 소름끼쳤다. 그게 정말 자랑할 일일까. 면접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서인지 망해가는 영화계에서 미생 신세여서 인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그분을 영접하고야 말았다. 내 인생에, 내 영화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프로그래머의 진지한 질문에 그는 시종일관 유머와 농담으로 대답했다. 프로그래머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너무 많이 받아왔던 질문이라 더이상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기로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다 관객과의 대화로 넘어갔는데 선택을 받은 축복받은 관객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했다. 올해가 데뷔 50주년이라는데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한 직업을, 영화를 할 수 있는거냐고. (참고로 이게 마지막 질문이 되었다. 다음 질문자가 질문은 없고 사진 찍게 해달라고 떼를 써서 주윤발 배우가 무대위로 불러줬고, 그의 돌발행동 덕에 프로그래머가 관객의 질문을 더이상 받지 않기로 했다. 참 더럽게 고맙다 관객양반) 주윤발 따거는 지금까지 유머로 응대하던 것과는 다르게 매우 진지한 어투로 아주 길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화라는 매체는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에, 매번 할때마다 황홀하다. 매편이 다 마법이고 내가 스크린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꿈만 같다.' 영화에 대한 사랑을 들으면서 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도 그런 이유로 영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독립장편까지는 찍었지만 상업영화를 찍지 못하고 있는, 그만두는게 나을 수 있지만 그만두기엔 아까운, 직함은 감독이지만 작가 경력이 더 많아진, 한국에서 가장 큰 영화 축제에 와서 혼자 술을 마시고 해운대를 걷는, 지옥과 천국 사이의 연옥에 있는 미생. 미생은 완생중에서도 돌 중의 돌을 만나 눈물을 흘렸다. 그 복합적인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건 불가능하다. 내 브런치 최초로 사진을 올린다. 자랑하고 싶어서다.
난 따거가 나를 봤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