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론자의 부국제 잡썰

by Renaissance

돌아왔습니다. 비관론자. 역도를 하면서 영화와 멀어져 한동안 괜찮았다가, 캐스팅 하던 영화가 또 한 배우에게 까이면서 더이상 진행이 안 될 거 같은 상황이 되자 비관론자로 돌아왔어요. 비관적이라 더욱 비판적인 시각을 한번 풀어볼까 합니다.


부국제는 여전히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영화제다. 대부분의 영화는 오픈과 함께 매진이다. 그래서 예매 하기가 매우 빡셌다. 난 겨우 한 편 예매했다. 나머진 부산에 내려가 현장 구매를 노려봐야한다. 부국제 예매를 하면서 싸한 느낌을 느꼈다. 한국 영화들은 대부분 시리즈를 영화로 편집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으니 영화제 입장에서도 초대할 영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OTT 시리즈를 영화버전으로 편집한 작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상황이 맞는건가. 부국제는 불과 몇년 전 상을 준 신인 남자배우가 없다고 신인남우상을 여성에게 시상한 이력이 있다. 미투 운동으로 영화계에 페미니즘 기류가 강하던 시기였고, 여성 감독의 여성 주연 영화들을 위주로 초청하다 보니 초청한 영화 중 남자 배우가 주요 역할을 한 작품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인남우상을 여배우에게 줬던 영화제가 초대할 영화가 없다고 시리즈를 영화 런닝타임으로 편집한 작품을 초청하는게 맞나? 초청할 영화가 없으니 이번 년도는 한국 영화가 몇 편 없다고 발표해야 하는거 아닌가? 상을 줄만한 남자배우가 없어서 여성에게 상을 준다고 발표한 것처럼? 칸은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을 따로 개최한다. 칸 영화제에 시리즈가 설 곳은 없다. 세계 최고의 영화제는 아직 시리즈와 타협할 생각이 없다. 한국 최고의 영화제는 너무 쉽게 타협하는 것 아닌가 싶다. 시리즈를 초청하고 싶으면 시리즈를 모두 틀던가. 시리즈를 영화 런닝타임으로 편집해 상영하는 이 괴팍한 짓을 왜 하는 건가. 시리즈 홍보의 장이 되어버린 부산국제영화제를 보면서 우리나라 영화계가 완전히 망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여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있어야지, 영화가 아니면 안 되는 곳이 있어야지. 시리즈로 대체되어도 된다는 목소리를 부산이 내면 안 되는 거잖아.


어머니가 갑자기 전화가 와서 TV에서 영화계 위기에 대한 프로그램을 한다고 보라고 하신 적이 있다. 나는 집에 TV가 없다. 성인이 된 후 독립하고 나서 집에 TV가 있던 적이 없다. 나는 TV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보기로 보겠다고 해놓고 찾아보니 해당 프로그램은 공익성 때문인지 유튜브로 동시 송출을 했다. 그래서 보았더니 내가 다 아는 이야기만 했다. 그래서 끄려다가 실시간 채팅이 재밌어서 계속 봤다. 넷플릭스 시리즈가 한국 영화보다 월등히 재밌기 때문에 한국 영화는 무조건 망할거다,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 넷플릭스 시리즈보다 재미있는 한국 영화가 있냐, 누군가의 답을 바라지 않고 계속 채팅을 쓰는 사람이 있었다. 넷플릭스 시리즈보다 재밌는 한국영화는 몇 백 편을 댈 수 있지만 대답해봐야 뭐하겠냐 싶어서 인터넷 뉴스에 댓글을 달지 않듯이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데 그 사람이 너무 신기했다. 수천명이 보는 채팅창에 저렇게 도배를 할 정도면 종교에 가까운 믿음을 가진건데, 넷플릭스 시리즈가 그 정도인가? 종교에 가까운 믿음을 줄 정도의 퀄리티인가? 정말로?


내가 영화를 막 시작하던 시기에, 그러니까 7년 전에 연남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의 연남동이 아니라 7년 전의 연남동은 평범한 술집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야할 정도로 모든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런 연남동의 술집에서 뒤에 앉은 20대 대학생들이 영화 얘기를 하길래 귀가 쫑긋했는데, 자신은 마블 영화만 본다는 얘기를 너무나 당당하게, 큰 소리로 얘기했다. 유행의 정점에 있는 공간에서 유행의 중심인 세대가 큰 소리로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그게 지적허영심을 충족시키는 얘기라는 소리다. 마블 영화를 보는 것이 시네필의 증거와도 같다는 소리. 그 얘기가 너무 충격적이라서 같이 있던 사람과 대화할 생각은 않고 계속 뒤에서 무슨 말을 하나 들었는데 마블 영화가 왜 위대한지, 한국 영화와 무엇이 다른지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7년이 지난 지금, 성수동이나 을지로의 술집에서 누군가 자신은 마블 영화만 본다는 애기를 큰 소리로 할 수 있을까? 절대로 아니다. 마블 영화만 본다는 소리는 더이상 지적허영심을 채우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바보 취급을 당하겠지. 사람들은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영화를 종종 이용한다. 시네필들도 하지 않나. 고다르를 좋아한다던가, 짐 자무시를 좋아한다던가, PTA를 좋아한다던가. 수천명이 보는 유튜브 채팅 공간에 넷플릭스 시리즈가 우월한다는 얘기를 당당히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7년 전에 마블만 본다는 얘기를 자신있게 했던 것처럼.


영화가 설 곳이 없다. 영화가 설 필요가 없다고 다들 생각하는 것 같다. 다른 나라들처럼 외화에 만족하면 되려나. 영화는 미국에서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야 하나. 어차피 영어도 잘 하는데 미국으로 갈까. 한국 최고의 영화제가 시리즈 페스티벌이 된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제작사가 캐스팅에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역도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상연 선수 아시안게임 동메달 땄더라. 전국 체전에 도전하는 것이 영화에 도전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나이 사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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