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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하 Dec 09. 2023

니가타에서 눈을 보다

에치고 유자와(越後湯沢)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눈의 고장이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雪國)>>


소설 설국을 심취해서 읽었던 날이 있다. 미묘한 감정을 문장과 문장 사이에 어쩜 이리도 섬세하게 숨겨놓았는지 그 매력에 푹 빠져든 날이 있었다. 소설의 배경이 된 에치고 유자와에 가면 왠지 그런 감성을 배워올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그곳에 가길 고대했다. 도쿄에 갔던 어느 날, 내 삶에 행간이 생겼고 망설임 없이 짐을 싸서 설국으로 향했다.


신칸센을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다음 역은 에치고 유자와’라는 안내 문구가 전광판에 반짝였고 긴 터널을 지나니 정말로 눈의 고장이 시작됐다. 소설을 번역한 문장이 제각기 다른데 에치고 유자와에 도착하자마자 느낀 것은 ‘눈의 고장’이라고 번역하기엔 뭔가 감성이 없고 ‘설국’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딱딱하다는 것이다. 눈의 나라, 눈의 왕국 등등 다른 단어로 표현해 보려고 애를 썼으나 노력하면 할수록 일본어로 ‘유키쿠니(ゆきぐに)’라고 읽는 그 발음이 마음에 쏙 들어서 다른 단어로 대체하기가 싫었다.



에치고 유자와에서는 어딜 가나 내 키보다 더 높이 쌓인 눈을 만날 수 있다. 그 속에서 숨을 한 번 그게 들이쉬면 눈 냄새가 코 속으로 들어와 기분을 좋게 만든다. 눈이 얼마나 많이 내리고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사람들은 포클레인으로 제설작업을 하고 있다. 더 재밌던 것은 워낙에 온천물이 흔한 곳이어서 사람이 다니는 길은 얼어붙지 않도록 온천물을 24시간 흘려대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을 천천히 둘러보며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직접 소설을 집필한 곳이라는 ‘다카한(高半旅館)’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입장료를 내고 그가 사용했다는 집필실로 향했다. 그곳은 매우 평범해 보여서 역시 현장에 와도 40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난 소설가를 만나기란 불가능한가 싶었다. 그렇게 조금 실망한 채로 문학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학관이란 언제나 작가의 누워있는 책들을 만나야 는데 표지들을 보며 감동을 받기엔 나의 상상력이 부족했다.


그렇게 작가와 소통하기는 끝났구나 하며 체념하려던 순간, 그의 사진과 만났다. 사진을 뚫고 나오는 안광(眼光)이 나의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듯하여 마치 그를 실제로 만났다고 믿을 정도였다. 엄청난 눈빛이었다. 그는 눈빛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작가였나 보다.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기운에 그저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에치고 유자와에 도착했을 때부터 내린 눈은 작은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숙소로 향할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료칸 주인은 오늘 밤은 눈 때문에 저녁 먹으러 나갔다가 사고가 날 수 있으니 료칸 내에서 저녁을 먹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날 저녁 가이세키(かいせき)* 정식을 먹고 온천을 하고 잠을 자기 전까지도 눈은 계속됐다. 그렇게 쌓인 눈은 다음 날도 다 다음 날도 세상의 모든 소리를 먹어버렸다. 혹시 이 고요함이 소설 설국을 집필한 힘이었다면 그날 밤, 나는 작가를 만났던 것 같다. 고요함이 며칠간, 유키쿠니를 덮쳤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 소설 <<설국>>으로 1968년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다.

가이세키(かいせき) : 1629년 일본 교유의 단시 하이쿠를 짓는 행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시를 짓는 동안 천천히 먹고 마실 수 있는 코스용 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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