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벨 정원 아침 산책을 마치고 운터스베르크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전날 미리 운터스베르크로 어떻게 가는지 알아봤었는데 미라벨 정원 버스정류장에서 25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되었다. 정류장에서 조금 기다리다 잘츠부르크 카드를 사용해 25번 버스에 올랐다. 나는 창가 좌석 한켠에 자리 잡았다.
25번 버스 시간표
어떤 한국인 가족이 이 버스에 이미 타고 있었다. 귓가로 들려오는 한국어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꼬마 아이 둘과 부부, 가족끼리 이 먼땅에 여행 온 것이 참 좋아 보였다. 다정한 이들을 보니 한국에 있는 내 그리운 가족들이 떠올랐다. 내가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들을 같이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언젠가 그런 날이 오려나?
운터베르크 케이블카 타는 곳
30여분간 버스를 타고 달려 종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케이블카 타는 곳이 보였다. 사람들을 쫓아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향했다. 운터스베르크 케이블카는 잘츠부르크 카드를 이용해 탑승할 수 있었다. 잘츠부르크 카드 하나로 많은 곳들을 이용할 수 있어서 여행하기 참 편리했다.
하지만 너무 일찍 온 탓일까 아니면 날씨가 흐렸기 때문일까? 케이블카를 운행하고 있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가득하고 비가 올듯 말듯한 꾸리꾸리한 날씨였다. 산 위로 올라 가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운터스베르크에 갈지 말지에 잠깐 고민을 했었다.
고민 끝에 멀리서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은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줄을 서서 케이블카가 운행할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케이블카 문이 열리고 운터스베르크로 갈 수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데 마치 구름 속으로 뛰어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위로 올라 갈수록 케이블카 주위가 하얀 구름들로 가득차서 나중에는 밑이 내려다 보이지도 않았다. 구름에 가려서 케이블카 줄이 보이지 않아 하늘 위를 둥둥 떠가는 느낌도 들었다. 온 시야가 하얗게 변했을 때는 마치 천국으로 가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라는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탄성을 자아내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뭉게 구름 가득한 하얀 바다가 내 발밑에 있었다. 너무 환상적이어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위의 모든 이들은 이 장엄한 광경에 압도 되어서 소리를 질렀고 제각기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유럽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 날이 아닐까? 흐린 날씨 덕택에 이렇게 황홀한 풍경을 보게 되었으니, 꾸릿한 날씨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이 멋있는 풍경 속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마음에 트래킹에 나섰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지만 혼자인 나는 자유로웠으니 무작정 길을 따라 걸었다. 구름 바다를 옆에 두고 걸으니 하늘 위를 걷는 듯 했다.
걷는 도중에 마주친 생명체! 바로 옆으로 안개 낀 돌산을 오르 내리고 있는 사슴이 보였다. 나와 그리고 같이 길을 걷던 일본인 커플은 우와- 소리를 지르며 사슴을 바라보았다. 사슴은 주위의 풍광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드는 생각이 아 맞다 사진! 셋 다 아차차하며 카메라를 꺼내는데 왠지 모르게 우스운 상황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 묘한 기운을 모두가 눈치를 챘는지 우린 서로를 보며 왁자지껄 마구 웃었다.
우리 모두는 사진기를 꺼내 열심히 눈앞의 신비로운 장면을 찍어댔다. 나는 필름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다가 안에 들어있는 필름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하필 수동 필름 카메라를 가져온 탓에 허겁지겁 필름을 감아서 빼낸 뒤 다시 새 필름을 갈아 끼우며 사슴아 가지마라 가지마라 마음 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사슴은 한동안 우리 쪽을 쳐다보며 가만히 서있었고 덕분에 잊지 못할 순간을 사진으로 잘 담을 수 있었다.
오르고 오르다가 문득 힘이 들때면 그냥 평평해 보이는 돌 바닥이나 흙 바닥에 철푸덕 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솔솔 바람이 불어와 내 살갗에 와 닿았다. 맑고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조용히 하얀 구름 바다를 바라 보았다. 세상 온갖 근심사들이 다 씻겨 나가고 아름다운 자연 속의 나만 남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걸으니 힘이 들어도 행복했다. 쌀쌀했던 날씨였지만 어느새 땀이 송글송글 흘러내려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패딩 외투를 벗고 허리에 걸쳐 묶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상쾌한 바람이 몸에 닿으며 흘러 내린 땀방울들을 데려갔다.
잠시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 봤는데 깜짝 놀랬다. 내가 이리도 많이 걸어 왔던가? 산 봉우리와 하얀 구름 그리고 내가 지나온 길,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아름다울까? 너무 아름다워서 비현실 적이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 곳에 내가 서 있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이 독서실에 처박혀서 시험 공부를 했고 매일매일 똑같은 삶을 살았었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이 스르륵 머릿 속에 스쳐 지나갔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데 나는 너무 좁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드디어 십자가 표식이 있는 정상에 도착했다. 보통은 고개를 올려다 보아야 보이는 하늘 위 구름들이 이제는 모두 내 발 밑에 있었다. 그 구름 위에 또 다른 구름들이 켜켜히 쌓여서 온 세상은 하얀빛으로 가득했다. 땅과 하늘의 경계가 모호한 하얀 세상, 나는 그 풍경을 앞에 두고 잠시 앉았다.
구름으로 가득한 하얀 세상
바람이 좋았던 독일 로텐부르크에서 데려온 내 여행 동지 바람이. 바람이를 들고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번 여행에서 항상 나와 함께한 친구이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바람이에게 이야기하면 되었고(물론 대꾸는 없었지만), 혼자 밤에 잠들기 무서울 때 바람이를 옆에 두고 자면 괜히 안심이 되었다.
유럽여행을 함께한 내 친구 바람이
나는 가방을 열어 아침에 싸들고 온 샌드위치와 물을 꺼냈다. 이 순간은 내 평생 잊지 못할 황홀했던 점심 식사로 기억에 남았다. 마치 양탄자 위에 올라탄 알라딘이 된 기분으로, 구름 융단 위에 앉아 샌드위치를 양껏 베어 물었다. 계속 걸었던 탓인지 무척 배가 고팠었다. 뭐라도 싸올 생각을 했던 내 자신에게 기특하다 칭찬하며 맛있게 샌드위치를 먹었다.
여기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었었지..
어쩌다 보니 계속 마주쳤던 일본인 커플
나홀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고요 속에 잠긴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현실적인 순간순간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 풍경들은 왠지 모르게 오늘이 지나면 사라질 것 같이 느껴졌다. 내가 다시 이곳을 찾지 않는다면 아마도 이 풍경은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일테지. 왜 항상 좋은 곳에 오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은 아쉬운 끝이 떠오르는 것일까?
파노라마로 촬영한 사진
한참을 정상에 머무르다가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되돌아가는 길.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는 살짝 걷힌 구름 너머로 초록빛 마을이 드문드문 보였다. 구름들이 모두 가시고 푸른 하늘 아래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모습은 얼마나 멋있을까! 다음에 운터스베르크를 꼭 다시 찾아와야겠다 생각했다.
일상에 젖어 들면서 강렬했던 추억들은 어느새 희미해졌다. 가끔씩 들춰보는 여행 사진들과 일기 속에서 그 때의 느낌과 생각들을 떠올려 보는데 모든 일들이 꿈만 같다. 분명 내가 두 눈으로 보고 느끼던 현실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들이 흐릿해진다. 더 희미해지기 전에 다시 가야겠지. 그리운 잘츠부르크로.
케이블카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 승강장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시간은 2시간 정도 훌쩍 흘러가 있었다. 너무나도 행복한 하루였다. 그리고 마음이 쓰리게 돌아가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안녕 운터스베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