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어느날 메밀꽃 가득하던 잘츠부르크
피곤에 절어있던 나는 터덜터덜 구글맵을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만 따져봐도 얼마나 걸은건지, 배낭을 맨 어깨가 저려왔다.
원래 계획은 오늘 미라벨 정원에서 운터베르크, 헬브룬 궁전까지 이동하며 탔었던 25번 버스를 타고 숙소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헬부른역 버스 정류장까지 돌아가기가 너무 지쳐서, 구글맵을 검색해 보곤 다른 버스를 타기로 했다.
구글에서 안내해준 170번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을 향해 걷는 길,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일단 내가 걷는 길 위로 단 한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걷는 사람은 오직 나 뿐,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 끝에 정류장이 나타날 것 같진 않았다. 무언가 음침한 기운이 온 몸을 감쌌다.
정돈이 잘 되었으나 사람은 없는 요상한 길, 끝도 없는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듯 했다. 이놈의 구글이 드디어 일을 내는구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구글 여태 잘 써놓고서는...) 하지만 누굴 탓하랴, 이 길을 택한건 바로 '나', 그런 선택을 했었던 내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계속 걸어야 할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헬브룬 정류장으로 되돌아가 확실한 길로 가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도 멀리 와버렸기에 일단 쭉 가보기로 했다. 여태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구글맵이 절대 틀릴리가 없다고, 꿀떡 침을 삼키며 억지로 믿어보기로 했다.
힘들고 막막했던 나에게 하늘에서 선물을 내려준 것일까? 우연찮게도 이 길을 지나며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되었다. 9월 어느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무수히 핀 메밀꽃들은 흐린 구름으로 꽉찼던 칙칙한 세상을 하얗게 밝혀 주었다.
메밀꽃밭 끝으로 눈을 돌리면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호엔잘츠부르크 성이 보인다. 잘츠부르크 어딜가나 자꾸만 눈에 보이던 오래된 성, 하얀 메밀꽃밭 위에 두둥실 떠있던 성의 모습은 잘츠부르크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떠오른다.
작년 9월 강원도 봉평에서는 효석 문화제가 한창이었다. 그 때 흐드러지게 피어난 메밀꽃들을 기억에 잘 남겨둔 덕택에 잘츠부르크의 메밀꽃밭을 무심코 스쳐가지 않을 수 있었다. 한국의 메밀꽃이나 오스트리아의 메밀꽃이나 달라보이진 않았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생겼는데 오스트리아에서도 메밀 요리를 먹을까? 유럽에서의 생활이 꽤 흘렀고 샌드위치가 입에 물려갈 무렵이었으니 구수한 메밀묵과 시원한 막국수가 그리워지는 하루였다.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보니 이 계절에 잘츠부르크를 찾은 것이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힘없이 걸으며 이 길로 들어선 것을 후회하고 원망했던 방금 전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힘든 기억을 되돌아보면 나름 좋은 추억들이 콕콕 박혀있다. 그래, 어떤 상황이든 언제나 최악일 수는 없으니까!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참고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렇게 하얀 메밀꽃밭을 옆에 두고 계속 걸었다.
결국 도착하게 된 버스 정류장, 분명 구글 지도상으로는 10분 거리였는데 1시간은 걸은 듯 온몸이 쑤셨다. 170번 버스 표지판이 떡하니 놓여있는 것을 보아하니 알맞게 잘 찾아왔나 보다. 하지만 버스 시간표에 나온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버스는 오지 않았다. 하염없이 정류장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익숙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뮌헨에서부터 같이 저녁밥을 먹고 함께하던 동행 한명이 이리로 온 것이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하필 이 정류장에서 이 시간에 만나게 된 것이 무척 신기했다. 이 친구도 나처럼 엄청난 길을 걸어왔고 또 아름다운 메밀꽃밭을 보았겠구나! 혼자가 아닌 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같이 버스를 기다리니 불안함은 줄어들고 평온해졌다. 오랜 기다림 끝에 히치하이킹이라도 해야하나 싶을 즈음, 기적같이 170번 버스가 멀리 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행여나 버스를 놓칠세라 우리는 손을 거세게 흔들며 버스를 세웠다.
버스에 올라 몇분을 갔을까? 버스 창문 너머로 잘츠부르크 강과 익숙한 시내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연히 마주쳤던 동행은 숙소에 가서 쉬겠다기에 안녕을 고하고, 나는 바로 들어가기가 아쉬워 버스에서 내려 시내를 걸었다.
걷다가 어느 조그만 카페 안으로 들어가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시켰다. 잔을 들고 카푸치노를 한모금 목구멍으로 넘기니 따뜻한 우유 거품에 온 몸이 녹는 듯 했다. 칙칙한 날씨의 연속이던 잘츠부르크, 그래서 그런지 따뜻한 음료들이 더욱 맛나게 느껴졌다. 카푸치노와 함께 커다란 쿠키가 덤으로 나왔는데 출출했던터라 너무 맛있었다. 이런 걸 바로 인생쿠키라고 하는 것일꺼야, 일기장을 꺼내어 끄적끄적 잘츠부르크에서의 생각들을 기록해 두었다.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카페를 나와서 숙소로 돌아왔다. 잘츠부르크 카드 안에 입장권이 포함되어 있는 유람선도 타려고 했으나 피곤해서 포기해버렸다. 침대에 누워 빈둥빈둥 쉬다가 오늘 마주쳤던 동행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잘츠부르크 시내의 나름 괜찮아 보이는 어느 식당 야외 테이블에 자리잡았다.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고 잘츠부르크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마지막이니 왠지 맥주도 먹어줘야할 것 같아 한잔씩 시켰다.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 붙잡고만 싶던 그리워질 모든 시간들, 잘츠부르크도 이제 안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