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맞은 아침, 따끈한 쌀밥을 먹고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던 날이었다. 숙소에서 쌀밥과 미역국, 오이김치, 감자채 볶음, 계란후라이 등등을 해주셔서 정말 맛있게 밥그릇을 비워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쌀밥을 먹으니 온몸에서 힘이 솟아 올랐다. 핏방울 하나하나에 탄수화물이 감도는 그런 기분이었다. 밥을 다 먹고 따뜻한 얼그레이 티 한잔을 마시며 잠시 여유를 즐기다가 밖으로 나왔다.
내가 정한 오늘의 첫 행선지는 바로 로댕 미술관이었다. 설렁설렁 걸으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작은 정원이 딸린 아름다운 미술관, 꼭 들러보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Varenne역에서 내렸다. 로댕 미술관 바로 옆에는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앵발리드가 있었다. 활짝 핀 장미꽃들이 가득 피어난 덩쿨 너머로 황금빛 둥그스름한 돔이 반짝였다.
작은 연못 위에는 아름다운 로댕 미술관의 반영이 담겨 있었다. 프랑스의 어느 장군이 쓰던 저택인데 로댕을 포함한 여러 예술가들의 아틀리에로 쓰이다가 프랑스 정부가 매입했다. 프랑스 정부에서 이 저택을 철거하려고 했으나 이곳을 사랑했던 로댕이 자신의 작품들을 기증하겠다고 했고 여러 예술가들의 노력이 더해져 현재 로댕 미술관으로 남게 되었다.
미술관에 들어서기 전 로댕의 지옥의 문을 보게 되었다. '지옥의 문'은 틀에 금속을 부어 만드는 방식이라서 원한다면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석고틀이 망가질 수 있어 프랑스 정부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개수를 12개로 지정해두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테마로 제작한 로댕의 역작. 가운데 생각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백여명이 넘는 인물들이 지옥의 문에 담겨있다. 지옥에 빠진 인간들의 순간순간들을 담아냈다. 거대한 검은 문은 하늘을 올려다 보아야 할 정도로 컸다.
내 인생을 쏟아부을 만한 그 무언가를 세상에 만들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벅차는 일일까? 로댕처럼 무언가를 남길 수는 없겠지만 이 문을 만들어나가는 동안 그의 기분이 어떠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 해본다.
입맞춤
미술관 안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마주한 로댕의 입맞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하얀 두 남녀의 조각. 로댕이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온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모습에 영감을 받아 만든 조각이다.
13세기 이탈리아, 라벤나 왕국의 프란체스카와 리미니 왕국의 지오반니는 정략 결혼을 하게 된다. 지오반니는 절음발이였는데, 리미니 왕국은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을 우려해 외모가 준수했던 지오반니의 동생 파올로를 내세워 프란체스카를 속여 결혼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는 사랑에 빠져 버린다. 둘이 책을 읽다가 눈이 맞아 키스를 나눈 뒤 이를 목격한 지오반니에게 모두 죽임을 당한다.
입맞춤
상황을 생각하고 조각을 보니 괜히 가슴이 뜨거워졌다. 키스 뒤 맞을 죽음, 이 둘은 죽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쾌락에 젖어들어 있었다. 그 순간은 죽음과 맞바꿀 정도로 황홀한 것이었을까? 둘의 사랑은 아름다울 수도 있었다. 왜 그들이 지옥에 떨어져야만 했을까. 순간은 조각으로 만들어져 영원으로 남았다.
아담(Adam)
칼레의 시민들 중 한명인 피에르 드 위쌍(Pierre de Wissant)
생각하는 사람
빅토르 위고
한참동안 안에서 조각들을 구경하다가 미술관 밖으로 나와서 아름다운 정원을 걸었다. 로댕이 바롱 저택에서 활동하며 이 정원을 아주 사랑했다고 한다. 정원 곳곳에 그의 조각상들이 여럿 놓여 있었다. 제일 먼저 마주친 조각상은 바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사람
정원에 피어난 시월의 장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evr).
아주 오래전부터 어디선가 배웠을 것이고 또 어디선가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알게 되었고 익숙한 이름이었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왠지 낯이 익었다.
생각하는 사람
두 눈으로 보니 생각보다 더 컸다. 조각상들은 대체로 사진으로 볼 때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느껴졌다. 조각상을 바라보면 사람의 근육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엉덩이와 허벅지 그리고 팔, 모든 신체가 살아 숨쉬는 듯 했다. 실제로 저 푸른색 껍데기 속에 사람이 앉아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하는 사람
정원 안쪽으로 들어섰다. 나무 그림자들이 푸릇한 잔디 위에 일렁였다. 그리고 군데군데 서있는 조각상들. 사람도 별로 없고 한적한 정원에는 햇살과 그림자, 바람이 설렁일 뿐이었다. 고요한 이곳이 참 좋았다.
발자크(Monument to Balzac)
로댕미술관 정원의 모습
이브(Eve)
La muse Whistler
비롱저택과 작은 연못
빅토르 위고(Victor Hugo)
빅토르 위고(Victor Hugo)
Monument to The Burghers of Calais
Nude Study for Jean d'Aire
Claude le Lorrain
정원에 있던 어느 가게에서 샌드위치와 사과 쥬스 하나를 사왔다. 아름다운 정원에 놓인 작은 벤치 위에 앉아 샌드위치를 까먹었다. 배가 고프니 어찌나 맛있던지 모른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더 맛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아주 먼 타국 땅, 혼자였지만 난 행복했다.
칼레의 시민들
샌드위치를 반 정도 먹으니 배가 차올라서 배낭 안에 남은 샌드위치를 쑤셔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나게 된 칼레의 시민들.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하던 중 프랑스의 칼레라는 곳이 오랜 저항을 하다 결국 영국의 공격에 무너지고 만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칼레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자, 칼레의 사람들은 왕과 협상을 시작한다. 왕은 누군가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칼레의 시민들 중 6명을 교수형에 처하는 조건으로 칼레의 사람들을 살려주기로 한다.
칼레의 시민들
그 때 자진해서 죽음을 선택했던 6명의 시민들을 조각으로 남긴 모습이 '칼레의 시민들' 작품이다. 칼레시의 의뢰로 로댕이 십년간 공을 들여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완성작을 보니 칼레시민들의 바램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시민들은 위풍당당한 영웅의 모습을 원했지만, 조각상에 담긴 6명은 공포와 두려움, 고뇌에 빠진 모습이었다. 조각상은 칼레시 변두리에서 방치되다가 한참 후에서야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죽음을 예정하고 죽을 자리로 걸어가는 순간 그 기분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로댕이 생각했던 것처럼 두렵고 공포스럽고 어쩌면 선택을 후회했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감정들을 감내하고 선택했다는 것, 그 점에서 이 6명의 사람들이 아직도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임신중이었던 에드워드 3세의 왕비가 간청한 덕분에 6명의 칼레 시민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세망령
파리에서 기억에 남았던 순간을 손꼽으라면 손에 꼽힐 곳인 로댕 미술관. 조용히 혼자서 미술관을 돌아보며 조각상들을 구경하고,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미술관을 걸었던 기억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파리를 찾는다면, 이곳 로댕 미술관은 꼭 다시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