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 정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깜짝 놀랬다. 알람에 의지하지 않고 내 스스로 새벽 6시에 눈을 뜬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고 밤에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내 자신을 야행성 인간으로 규정지어 왔었다. 하지만 유럽여행 중 나는 저절로 아침형 인간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수없이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왜냐면 그것이 건강한 생활 패턴이고 밤에 늦게 자는 것은 좋지 않다고 이야기해왔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백날 들었어도 전혀 와닿지 않았고 내가 편한대로 사는 것이 좋다 생각하며 야행성을 유지했었다. 그런데 아침형 인간이 되어보니 너무 좋았다. 해가 뜨려고 할 때의 하늘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축축하면서도 화한 이른 아침 공기도 좋았다. 이런 것들을 느끼려면 아침형이 되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난 밤도 좋고 아침도 좋으니 어느 하나를 고집하기 보다는 온 시간을 다 느끼며 재미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이델베르크를 떠날 준비를 하면서 어제 사온 요플레와 과일을 먹으며 아침요기를 했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오는 날을 좋아하지만 오늘은 예외다. 비오는 날에 캐리어를 끌고 먼 길을 걸을 생각을 하니 막막해졌다.
숙소 나가는 길, 계단에서 보이던 놀이터 풍경
촉촉히 비로 젹셔진 거리를 걷는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숙소를 떠나려고 할 때 비가 그쳤다. 비는 내리지 않지만 앞서 내린 비가 땅을 촉촉히 젹셨다. 비오면 풍기는 흙냄새를 맡으며 캐리어 끌고 중앙역으로 이동했다.
사건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유럽여행의 첫번째 고생문이 여기서 열렸다. 내가 중앙역으로 온 이유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뉘른베르크로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중앙역 맥도날드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질 않았다. 취리히 가는 버스, 베를린 가는 버스 등등 차례차례 버스들이 내 눈앞을 스쳐갔다. 내가 타야할 뉘른베르크행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았다. 비는 추적추적 다시 내리다가 우수수 쏟아졌다.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버스를 타고 떠났고, 마지막에는 나와 나보다 먼저 정류장에서 기다리고있던 독일인 커플만 남았다. '엔슐디궁(entschuldigung)' 하고 독일인 커플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엔슐디궁 말하는 순간 나는 그들과 내가 같은 처지임을 깨달았다. 남자가 나에게 혹시 뉘른베르크에 가냐고 물었다. 본인들도 뉘른베르크에 간다며 버스가 왜 안오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하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지 남자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심각하게 통화를 했지만 독어라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남자의 헛웃음과 표정을 보아하니 일이 잘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나에게 이야기했다.
'저기, 이미 버스가 갔다네요'
'그럼 어떻해요? 다음 버스라도 탈 수 있나요?'
'아니요... 기차타고 가야 할 것 같아요(헛웃음)'
하하하. 나도 덩달아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아까 9시 12분에 떠난 베를린행 버스가 뉘른베르크 가는 버스였다는거다. 하지만 우리가 예약한 표에 보이는 버스 출발시간은 분명 9시 20분이었다.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어찌해야할까를 고민해보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버스로 가는 건 포기하고 다같이 기차를 타러 중앙역 안으로 들어갔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뉘른베르크 가는 기차는 75유로였다. 유럽여행 중 가장 비싼 기차를 얼떨결에 타게 되었다. 게다가 괜히 자리를 예약해서 예약비도 덩달아 들었다.
'자리 예약 해줄까요?'
'그거 꼭 해야하는건가요?'
'아니요. 하지만 하면 더 편하죠!'
'그럼 해주세요'
하지만 나는 자리를 예약하는데 돈이 따로 추가되는 줄은 몰랐다. 뒤늦게 요금이 추가된걸 알고는 비맞으며 고생했는데 이왕 돈 낸거 편히 앉아 가자는 마인드로 기차에 탔다. 독일인 커플과 안녕을하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에 올랐는데 어째서 내가 예약한 열차 칸이 없는 것일까? 게다가 자리 예약까지했는데 말이다. 내 열차칸은 269번이었는데, 268번 그리고 270번도 있는데 269번 열차 칸만 없는 것이다. 어디 앉아야 할지 몰라서 우왕자왕하고 있으니 어떤 독일인 아주머니께서 '도와줄까'라고 말을 건내셨다.
내 사정을 이야기하니 아주머니께서는 독일이 원래 그렇다며 웃으신다. 예약해도 열차 칸이 자주 사라지니 걱정하지 말고 자기 옆에 앉아라 그리고 승무원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물어봐 주겠다고 하셨다. 덕분에 나는 안심하고 아주머니 옆에 앉았다.
나중에 승무원이 지나가는걸 아주머니께서 붙잡고 뭐라뭐라 물어보시더라. 독일어라서 알아들을 수 없으니 나는 바보처럼 가만히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아주머니께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본인 옆에 앉아서 가도 괜찮으니 이런 상황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니었지만, 여행 초짜였던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나에게 괜찮다고 웃으며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큰 위안이 되던지!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뉘른베르크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하이델베르크에서 뉘른베르크로 가려면 프랑크푸르트에서 내려 환승해야 했다. 우연찮게도 아주머니도 프랑크푸르트에 가던 길이라 우린 같은 곳에서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 내리고 나니 환승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에서 10시 46분에 출발해 프랑크프루트에 11시 40분에 도착하여, 11시 54분 출발하는 뉘른베르크행 기차를 갈아타는 것이 내 기차표에 적혀있던 일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50분, 즉 단 4분만에 뉘른베르크행 기차로 갈아타야만 했다.
아주머니와 작별인사를 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안내판을 보고 기차를 갈아타러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나를 지켜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그리로 내려가지 말라고 외쳤다. 내 표를 쓱 보시고는 갈아타는 곳으로 가는 빠른 방법을 알려주셨다. 덕분에 나는 기차를 놓치지 않고 제 시간에 탈 수 있었다. 안내판을 쫓아 계단 아래로 캐리어 끌고 내려갔으면 기차를 못탈뻔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뉘른베르크. 하지만 나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뉘른베르크 중앙역에서 내가 예약해둔 숙소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예약한 숙소에서 안내해 주었던 방법대로 지하철 매표기 화면을 눌렀건만, 안내받은 저렴한 가격의 표가 나오질 않았다. 그냥 돈을 조금 더 주고 대충 하나 사서 가버리자 맘을 먹었는데,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냈다. 까만 곱슬 머리카락에 눈동자가 파랗던 키가 큰 독일 청년이었다.
'(매표기를 누르며)여기 가려면 1.8유로 짜리 이 표를 사야해. 그래야 제일 싸!'
'도와줘서 고마워'
'나도 Rathenplatz로 가는 길이였어. 나를 따라올래?'
기차에서 마주쳤던 아주머니처럼 까만 머리카락의 독일 청년과도 목적지가 같았다. 이상하게도 여행 내내 그렇게 긴장하고 의심하던 내가 아무런 경계심 없이 독일 청년 뒤를 졸졸 따라가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밖으로 나가는 출구 방향은 달라서 그와 작별인사를 해야했다. 나에게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며 떠나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뭉클해졌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기에 지치고 힘들었어도 행복한 추억으로 남은 하루였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건내며 도와주었던 그들을 떠올리면 하이델베르크, 뉘른베르크 그리고 독일이라는 나라까지 모두 사랑스러워진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우리나라에 찾아온 이들에게 먼저 말을 건내며 돕고자 했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전혀 없었다. 나의 별것 아닌 한마디와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기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한국에 돌아가면 내가 먼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내보자. 그래야 이 낯선 도시에서 나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냈던 이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뉘른베르크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