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각보다 오래, 보이지 않는 선을 붙들며 살아간다
얼마 전 브런치에 올렸던 스타벅스에 관한 글을 다시 읽어 보다가 문득 영역이라는 단어에 오래 머물렀다.
사람은 생각보다 넓은 세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을 자기 자리 하나를 원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가을이와 봄이를 바라보며, 그 조용한 경계에 대해 생각했다.
발톱은 감췄지만, 경계까지 버린 것은 아니다.
영역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대개 아주 작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어릴 때만 해도 그것은 작고도 유치한 형태였다. 방바닥에 누워 “여기는 내 자리, 거기는 네 자리” 하며 선을 긋고, 소파 한쪽을 먼저 차지했다고 괜히 예민해지고, 책상 한 귀퉁이를 두고 시시한 신경전을 벌이곤 했다. 그때는 그저 철없는 고집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안에는 이미 본능이 있었다. 어디까지가 편안하고, 어디서부터가 불쾌한지.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자리의 감각을 배운다. 경계는 교육보다 먼저 몸에 스민다.
고양이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자기 영역을 분명히 알고, 그 영역이 흐트러지는 것을 싫어한다. 냄새를 확인하고, 동선을 기억하고, 늘 눕던 자리를 되짚는다. 특별한 일도 없는데 방 안을 한 바퀴 도는 것은 무료함이 아니라 순찰에 가깝다. 자기 세계에 균열이 없는지 확인하는 일.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내 자리가 아직 내 자리인지 점검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우리 집의 가을이와 봄이를 보고 있으면 그 본능이 얼마나 정직한지 자주 깨닫게 된다.
가을이는 검은 몸을 낮게 깔고 집 안을 천천히 돈다. 조용하지만 허술하지는 않다. 문틈 사이로 스며든 낯선 냄새 하나, 바닥에 떨어진 작은 물건 하나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늘 자기가 눕던 자리에는 이상하리만치 엄격해서, 내가 무심코 그 자리에 가방이나 옷을 올려두면 한동안 그 앞을 맴돈다. 불만을 드러낸다기보다 확인하는 쪽에 가깝다. 여기가 아직 자기 자리인지, 자기 세계의 질서가 아직 원래대로 남아 있는지.
봄이는 가을이보다 조금 더 능청스럽다. 하지만 그 애 역시 본질은 다르지 않다. 해가 드는 시간마다 비슷한 자리를 찾아가 몸을 길게 늘이고, 내가 다른 물건을 놓아두면 그 위에 올라가 몸으로 눌러버린다. 마치 말없이 자기 흔적을 덧씌우듯이. 이 집 안의 많은 부분이 결국 자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선언처럼 보일 때가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동물보다 훨씬 세련된 척하지만, 실은 더 복잡하고 더 음성적인 방식으로 자기 영역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여긴 내 자리야” 같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대신 자주 가는 카페에서 늘 비슷한 자리를 고르고, 내 책상 위 물건의 위치가 조금만 달라져도 미세한 이물감을 느끼고, 내 시간을 함부로 잠식하는 사람을 서서히 멀리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예민함이라 부르겠지만, 실은 자기 보존에 더 가깝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겨우 구축해 놓은 질서를 하나쯤 가지고 있다. 그것이 남에게는 사소해 보여도, 본인에게는 하루를 버티게 하는 최소한의 구조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돌아간다.
멀리 나갔다가도, 많이 어울렸다가도, 오래 웃고 떠든 뒤에도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밤도 그렇다. 시끄러운 농담과 조금 과장된 진심, 이미 끝난 이야기를 다시 끌어와 해부하는 시간, 서로가 서로에게 잠시 피난처가 되어주는 순간들. 그 순간만큼은 서로의 경계를 잠시 유예한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자리가 아무리 좋고 길어도 끝내는 흩어진다. 각자의 집으로, 각자의 침대로, 각자의 적막으로 돌아간다. 술기운이 덜 가신 몸으로 현관문을 열고 불 꺼진 방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안도한다. 오늘 하루를 끝까지 자기 자리로 데려왔다는 사실에.
어쩌면 집이라는 것은 쉬는 곳이라기보다 회수하는 곳에 가깝다.
밖으로 너무 많이 흘려보낸 나를 다시 거둬들이고, 하루 동안 마모된 경계를 조용히 봉합하는 장소. 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불빛을 조금 줄이고, 내 체온이 배어 있는 침대에 몸을 눕히는 일. 그 익숙한 순서 속에서 사람은 서서히 자기 형태를 회복한다. 나 역시 그렇다. 밖에서 아무리 말을 많이 하고 와도, 결국 방 안에 들어와 문을 닫는 순간에야 내 안쪽의 소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시간 가까이에 가을이와 봄이가 있다.
가을이는 무심한 척 발치 어딘가를 차지하고, 봄이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몸을 밀착시키며 자기 자리와 내 자리를 겹쳐놓는다. 그 장면은 묘하게 다정하면서도 동시에 냉정하다. 서로의 곁에 있지만, 서로를 함부로 침범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가능해지는 평온이 있다.
인간의 영역 싸움은 노골적이지 않아서 오히려 더 알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더 이상 몸으로 밀어내거나 소리 내어 으르렁대지 않는다. 대신 말수를 줄이고, 답장을 늦추고, 다시는 가지 않을 장소를 조용히 정하고, 어떤 관계에는 더 이상 마음을 들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세계를 방어한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늘 작은 사수가 벌어진다.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나 자신이 침식되지 않기 위해서. 사람은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는다. 대신 서서히 잠식된다. 매일 조금씩, 소리 없이, 안쪽부터 닳아간다. 그래서 경계는 중요하다. 그것은 유난이나 고집이 아니라 생존에 가까운 문제다.
삶도 결국 그렇다.
이 삶 전체가 어쩌면 내가 끝까지 사수해야 할 가장 큰 영역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내 시간을 함부로 침범하는 것들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나를 소모시키는 관계를 견디면서도 속으로는 후퇴할 준비를 한다. 누군가는 양보와 타협이 성숙이라고 말하지만, 너무 오래 내어준 사람은 결국 자기 삶의 윤곽을 잃는다. 사람은 넓은 세상을 가져서 버티는 것이 아니다. 겨우 자기 몫의 세계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기 위해 버틴다. 좋아하는 장소를 반복해서 찾는 일, 특정한 사람 앞에서만 말이 많아지는 일,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는 마음의 방을 따로 남겨두는 일. 그것들은 전부 어른이 된 뒤의 영역 표시다. 훨씬 고요하고, 훨씬 교묘하고, 그래서 훨씬 절실하다.
어릴 때 내 자리는 소파 한쪽이었고, 책상 한 칸이었고, 이불의 가장 안쪽이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내 자리는 내 생활의 리듬이 되었고, 내 취향이 되었고, 내 침묵이 되었고, 내 관계의 거리감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쉽게 설명되지 않는 것들, 하지만 함부로 흔들리면 나라는 구조 전체가 미세하게 기울어버리는 것들. 사람은 그런 보이지 않는 선들 위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대개는, 잃기 전까지 그 선의 중요성을 모른다.
오늘도 가을이와 봄이는 집 안을 제 방식대로 돈다.
창가를 확인하고, 늘 자기들이 눕던 자리를 지나고, 내가 있는 방에 잠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 그 작은 몸들이 각자의 동선으로 자기 세계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상할 만큼 안심이 된다. 삶이란 대단한 성취 이전에, 먼저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함부로 빼앗기지 않고, 함부로 내어주지 않고, 끝내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범위를 지켜내는 일. 우리는 그것을 자존심이라 부르기도 하고, 버팀이라 부르기도 하고, 성격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같은 말일지 모른다. 각자의 생이 완전히 침범당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경계를 끝까지 붙드는 일.
결국 사람도 고양이처럼 살아간다.
세상을 다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겨우 자기 자리 하나를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가장 잔인한 것은 사람이 대개 그 자리를 잃고 난 뒤에야,
그것이 자기 삶의 전부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는 점이다.